한국연극인복지재단이 11일 주최하는 콘서트에 재능 기부로 참여하는 배우 남경주(왼쪽부터), 최정원, 김호영, 아이비. 이 재단을 후원해 온 '복덕방 2005' 등 기부자들에게 감사하는 자리다. /신시컴퍼니

칠 년 가뭄에 비 오기 기다리듯, 구 년 홍수에 볕밭 기다리듯 자신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헐벗은 처자식을 생각하며 먹을 것을 구하는 흥부에게 놀부는 이런 말을 한다.

“쌀이 많다 한들 너 주자고 노적 헐며, 돈이 많다 한들 너 주자고 궤돈 헐며, 찬밥이나 주자 한들 너 주자고 새끼 낳은 거먹 암캐 굶기며……. 겻섬이나 주자 한들 큰 농우가 너 주자고 소 굶기랴. 이 염치없고 속없는 놈아!”

내버려뒀다간 흥부를 돕지 않을 이유를 백만 가지도 넘게 쏟아부을 것 같은 놀부의 이 모진 대사가 연극인 복지재단 일을 하면서 문득문득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곤 했다.

“돈이 많다 한들 보도 듣도 못 한 연극인 돕겠다고 내 통장 헐어야겠냐?” 기부용지를 들고 우물거릴 때마다 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가방 안에 다시 쑤셔 넣는 일이 반복됐다. 3년을 하면서도 이 모양인 건 무슨 까닭인가 곰곰 생각해 보니 ‘내 안에도 놀부가 들어앉아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이게 보람되고 좋은 일이라는 건 잘 알겠는데 여기에 돈을 쓸 때 문득문득 아들의 낡은 패딩이 어른거리고, 폭신한 신발이 있는데 비싸서 신어만 보고 그냥 왔다는 엄마 얼굴도 떠오르고…. 우리 안에 다 그런 마음이 조금씩은 있지 않나……. 내 거, 내 가족, 내 주변이나 잘 챙겨야지 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혹시 그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입 떼는 게 어려운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주변머리 없음이 지나친 자기반성으로 번져, 되도 안 되는 얘기를 늘어놓고 있을 즈음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긴급 지원 신청자들은 많은데 쓸 수 있는 돈이 얼마 남아 있지 않고 이걸 어쩌나 한숨만 폭폭 쉬고 있는데 후원금 관리팀장이 회의실로 뛰어 들어와 휴대전화를 다짜고짜 내밀었다.

띵 띵 알림 음이 울릴 때마다 누군가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기부금이 들어와 쌓이고 있었다. 뭐지 이거?

가수 현숙, 인순이. 배우 김영철, 정보석, 유동근, 최정원, 아이비, 전 검찰총장 문무일, 정우스님, 차병원, 길병원, 호원병원 원장님, 오양호 변호사님에 김난도 교수님까지…. “교집합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각계각층 분들이 갑자기? 왜 ?”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누군가 꺅 소리를 질렀다. “선동열? 그 야구 선수 선동열? 나 완전 팬인데…. 이게 뭔 일이야?”

이 놀라운 마법을 부린 사람은 신시컴퍼니의 박명성 대표님이었다. 연극계 큰 상을 타고서 지인들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며 복지재단에 대한 마음을 전하셨는데 그분들이 바로 문자를 받자마자 별풍선 쏘듯이 기부금을 보내 주신 것이었다.

그 기적 같은 일은 한 달 넘게 이어졌다. 3년 전부터 꾸준히 도와주신 김장호 회장님, 신식우, 황원택, 김한모 대표님을 비롯해 이승현, 하동길, 우찬규, 윤시영, 김홍규님 등이 손길을 더해주셨고 그렇게 한 달도 채 안 돼서 150명이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들이 보내 주신 기부금은 바로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연극인들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받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기쁘지?”

무심코 뱉은 누군가의 말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우리 왜 이렇게 기쁘고 신나지?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이 봉사라더니 모인 사람들 얼굴에 절로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분들께 따로 이름을 지어드리면 어떨까?” 누군가의 말에 경쟁하듯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복을 짓고 덕을 쌓는 방에 모인 사람들, 어때?” “거기에 복지재단 설립연도인 2005를 붙이면 좋을 것 같은데.” 기분이 좋으니 머리들도 잘 돌아가고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탄생한 이름이 ‘복덕방 2005’였다.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을 후원하는 '복덕방 2005'. 복을 짓고 덕을 쌓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길해연 제공

이름을 짓고 나니 또 다른 욕심이 났다. 새로이 복덕방에 모여주신 분들과 2005년부터 묵묵하게 재단을 지켜 주신 기부자분들께 작은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면 좋을 것 같은데……. 철없이 들떠 대책 없는 얘기들을 쏟아 내는 우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멍석 깔아 주는 남자의 주인공, 박명성 대표님이 이번에도 멋진 자리를 단박에 깔아 주셨다.

“연습실에서 작은 공연으로 보답하면 어떨까?”

와 너무 좋다! 준비해 볼게요. 주중 언제 모여 의논할까? 날짜 헤아리고 있는데 이 양반 벌써 출연자 섭외를 끝내 버렸다.

“다 재능 기부로 기쁘게 참여한다네.”

박정자, 남경주, 최정원, 마이클 리, 김호영, 정선아, 박혜미, 박지연. 무형 문화재 박종숙, 박동매. 소프라노 김은경, 마임이스트 고재경. 아…. 정말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울밤의 시어터치 콘서트 어떤가?”

우린 이제 만날 날을 정했는데 이 양반은 벌써 행사 제목도 짓고 행사 순서까지 다 짜고 심지어는 대본까지 완성해서 보내오셨다. “아따 복지재단 일하다 신시에서 쫓겨나겄네(웃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매일매일 일을 더 크게 벌이고 있는 모습이 딱 크리스마스트리에 장식 달며 신나하는 아이 같아 보였다. 덩달아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신바람이 나서 발표하겠다고 손부터 번쩍 드는 아이들처럼 “저요 저요”를 외치며 자진해서 궂은 일들을 하겠다고 나서기 시작했다.

놀부가 자기 노적과 돈궤짝을 지키다 놓쳐 버린 행복. 그것을 우리는 ‘복덕방 2005’를 시작으로 서로에게 기쁨의 배턴을 넘기며 나도 좋고 남도 좋은 행복 계주를 이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사람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음악을 듣고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니……. 그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아직은 꽤 살아볼 만한 세상이네! 안도가 되지 않을까 벌써 가슴이 뭉클해진다.

오는 11일 열리는 '겨울밤의 씨어터치 콘서트' 초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