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동 회현 지하 쇼핑센터 1번 출구 앞’은 겨울철 외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로 꼽힌다. 길 건너편 신세계백화점 본관 크리스마스 장식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에 최적지로 소문 났다. 국내 MZ세대까지 몰리면서, 출구 앞은 해마다 11월부터 이듬해 1월, 크리스마스 장식에 불 들어오는 매일 오후 5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유나영(43) 신세계백화점 VMD 담당은 신세계 본관을 ‘크리스마스 사진 성지(聖地)’로 만든 주인공이다. VMD는 ‘비주얼 머천다이저(Visual Merchandiser)의 약자. 그녀는 본관 외벽을 LED 375만개로 감싸 하나의 거대한 스크린(63x18m)으로 만들고, 여기에 영상을 쏴 화려하고 역동적인 ‘미디어 파사드 쇼’로 탈바꿈시켰다. 지난 8일 최종 점등 리허설 때 만난 유나영 담당은 “기대치가 매년 올라가, 작년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 벌써 내년 아이디어를 궁리하고 있다”며 웃었다.

◇일 년 동안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여자

-올해 크리스마스 장식 주제는 뭔가.

“판타지 월드로 떠나는 여행이다. 한 편의 크리스마스 판타지 극을 선보인다. 영상 속 붉은 커튼이 좌우로 걷히고 성대한 문이 열리면 루돌프 사슴, 호두까기 병정, 테디베어 같은 캐릭터들과 함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세계로 여행하게 된다.”

-올해 처음으로 외부 전문가들과 함께 작업했다고.

“주제 구상까지는 나와 팀원들이 하고, 구체적으로 시각화하고 스토리로 풀어내는 건 외부 전문가에게 맡겼다. 작년까지는 우리 팀에서 직접 다 했지만, 이렇게 계속 할 일은 아니다 싶었다. 기대치가 올라가고 더 많은 대중을 모으다 보니 내 머릿속에 있는 것만으론 안 되겠다 싶어 전문가를 찾았다.”

-올해 함께 작업한 전문가는 누구인가.

“그건 비밀이다. 해마다 이 무렵 백화점 3사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연말 고객 끌기 경쟁을 벌인다. 다른 백화점들도 이 기사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함구하겠다(웃음).”

-보통 10개월 정도 준비한다고 알려졌는데.

“지난 2월에 콘셉트 후보 3개를 구상했다. 3월에 1분 길이 짧은 영상 3개에 배경음악까지 입혔고, 4월 말 상부에 보고를 드렸다. 그 후보 중에 선택된 콘셉트대로 풀버전(full-version) 영상과 음악을 제작했고 9월에 컨펌(확정)을 받았다. 10월에 영상의 채도·조도·휘도·명도 등 디테일을 조금씩 손본 다음 현장에서 사용할 ‘매핑 영상’을 만들어 11월 초부터 테스트했다.”

-해마다 콘셉트를 3개나 준비하려면 쉴 틈도 없겠다.

“내년 크리스마스 장식을 지금 구상·기획하고 있다.”

-올해는 평년보다 일찍(11월 9일) 점등했다.

“대개 11월 중순부터 크리스마스 장식을 밝히는데 올해는 조금 빠른 편이다. 핼러윈데이를 별 이벤트 없이 조용히 지나갔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장식 점등을 앞당겼다.”

9일 오후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외벽에 미디어 파사드 영상을 이용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불을 밝히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본점 외벽의 미디어 파사드는 375만 개의 LED 칩을 사용, 63x18m 크기의 거대한 스크린으로 탈바꿈했다. 이날을 시작으로 내년 1월 말까지 매일 오후 5시 30분부터 3분 가량의 영상이 반복 재생될 예정이다. /박상훈 기자

-신세계백화점 크리스마스 장식은 역사가 50년이나 된다고.

“1970년대부터 했다는데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유튜브 등을 검색해보면 전구로 장식한 1970년대 본관 사진이 나오긴 한다. 기록상으로는 12년 전인 2011년부터 제대로 해왔다. 내가 맡은 건 2018년부터다. 2018년 ‘동화 같은 크리스마스 스토리’, 2019년 ‘행복을 전달하는 크리스마스’, 2020년 ‘신세계와 떠나는 한겨울 기차 여행’, 2021년 ‘마법 같은 서커스’, 2022년 ‘마법사들의 성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파티’ 등 매년 주제를 달리해왔다.”

-2021년 장식이 특히 화제였다.

“코로나로 힘들고 우울한 시기에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 ‘서커스’를 주제로 잡았다. 서커스를 보면 흥겹고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영화 ‘위대한 쇼맨’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공연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그때부터 회현 지하 쇼핑센터 1번 출구 앞이 관광객들과 MZ세대가 몰리는 셀카 성지가 됐다. 많은 인파가 몰리는 만큼 안전 관리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2021년부터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면서 본관 외벽에 걸린 광고를 떼냈다.

“미디어 파사드 중간중간 광고가 있으니 흐름이 끊기고 산만해지면서 임팩트가 약해지는 게 아쉬웠다. 고민 끝에 상부에 보고했더니 과감하게 ‘그렇게 해보라’고 했고, 광고주였던 샤넬도 허락해줘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사할 때 샤넬 광고를 제일 늦게 떼고 제일 먼저 붙이고 있다(웃음).”

-광고비 손해가 꽤 될 텐데.

“본사 고객기획팀에서 소비자 인지도 조사를 했는데, ‘크리스마스=신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정확한 수치를 밝히긴 어렵지만 유입 고객률도 크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백화점 브랜드 이미지와 기업 가치가 상승했다는 분석이다. 우리 백화점 브랜딩에 기여했다는 데 VMD로서 큰 보람을 느낀다.”

-참고하는 해외 백화점이 있나.

“프랑스 파리 봉마르셰·사마리텐, 영국 런던 해러즈·셀프리지, 이렇게 4개 백화점을 주로 참고한다. 4곳 모두 기본적으로 잘하지만 특히 해러즈는 오랜 세월 쌓인 그 엄청난 유산을 격조 있으면서도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게, 캐주얼하면서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세련된 감각으로 풀어낸다. 셀프리지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하다. 우리가 미처 생각 못 하는 부분을 포착해 재미있는 콘텐츠로 담아내는 아이디어와 센스가 좋다.

-국내 라이벌들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평가한다면.

“롯데백화점와 현대백화점 둘 다 잘한다(웃음). 현대는 최근 투자를 엄청 하는 듯하다. 올해는 유럽 마을의 크리스마스 거리를 그대로 재현했더라. 우리가 관람객을 세상에 없는 환상세계로 데려간다면, 현대는 유럽의 크리스마스를 경험하게 해주려는 것 같다.”

◇쉴 때도 쉬지 못하는 VMD의 직업병

유 VMD 담당은 패션 의류 기업 이랜드에서 4년, 삼성물산 패션 부문에서 5년 동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했다. 1년간 영국 유학 뒤 2013년 신세계백화점에 입사했다. 2017년까지 신세계 편집숍 ‘분더샵’ VMD로 일하다 2018년부터 백화점으로 옮겼다.

-VMD는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인가.

“고객이 상품을 더 매력적으로 이해하도록 배치하고 공간을 꾸미는 일을 한다. 백화점에서 파는 상품은 그냥 진열대에 갖다 놓는 게 아니다. 상품이 돋보이도록 조명을 어떤 각도로 비출지, 어떤 그림이나 소품을 곁들일지, 전체 공간이 어떤 분위기를 자아낼지 등을 총괄한다. 쇼윈도 연출부터 크리스마스 장식까지 모두 VMD의 업무다.”

-대학에서 특정 분야를 전공하거나 자격증 같은 게 필요한가.

“그렇지 않다. VMD는 디자인 관련 업무 중에서 전공 제한이 가장 없는 것 같다. 나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고, 10여 년간 인테리어 디자인을 했다. 신세계에서 VMD를 뽑는데 공간을 아는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는 자격 조건이 있었는데, 내가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합격한 것 같다.”

-VMD가 되려면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

“우리 매장에 어떤 사람들이 오는지, 그들의 취향과 원하는 상품을 알아채서 공간의 특성에 맞게 연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물이나 현상의 매력을 꿰뚫어보는 눈썰미가 중요하다.

-눈썰미는 타고나야 하는 거 아닌가.

“타고나기도 하지만 많이 보고 듣고 느껴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나. 보고 끝이 아니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미술품을 보고 그냥 ‘예쁘다, 멋지다’ 말하고 끝나는 게 아닌,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분석해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그대로 따라 하면 모방일 뿐이다. 재해석해 내놓으려면 내 안에 경험과 아이디어가 많이 축적돼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많이 보고 많이 느껴야 하는 것이다.”

신세계백화점 유나영 VMD 담당은 "부모 따라 온 아이들에게도 지루하지 않은 백화점이 되도록 VMD 하고 싶다"고 했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영화, 광고, 미술품 등 시각예술뿐 아니라 음악에서도 영감을 얻나.

“올해 미디어 파사드 쇼에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2번 3악장이 어울린다고 판단해 배경음악으로 썼다. 하지만 클래식을 그대로 사용하면 대중에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캐럴과 조화시켜 명랑한 음악으로 만들었다.”

-아동을 위한 공간 VMD도 하고 싶다고 들었다.

“백화점은 어른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아이들에게는 지루한 공간이다. 내 아들도 백화점 가자면 싫어한다. 부모를 위해 아이가 희생해야 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부모와 아이,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백화점에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동을 위한 VMD의 사례가 있나.

“2006년 김해점을 오픈할 때다. 키즈 라운지에 커다란 고릴라 인형을 가져다 놓았다. 그저 장식이었다. 놔두면 멋질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고릴라에게 안기기도 하고, 잡아당기기도 하면서 놀았다. 일방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만지고 느끼며 교감할 수 있는 연출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VMD로서 직업병이라면.

“어디를 가건, 무엇을 보건 ‘이걸 어떻게 써먹을까’ 궁리한다. 스위치 끄고 쉬고 싶을 때도 있는데 잘 안 된다. 어느 주말에 아들·남편과 공원으로 놀러갔는데, 나는 어떤 장면을 보고 ‘저걸 크리스마스 장식에 담아볼까’ 생각하고 있더라(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