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사원 때 “죄송합니다”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가장 많이 쓰는 말 중 하나였다. 나름의 방어 기제였다. 틀어진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조급한 성격 때문이었나. 미움받고 싶지 않은 소심함 때문이었나. 선배들의 눈빛이 ‘네가 잘못한 것 같아’라고 말을 걸어오면, 바로 “죄송합니다”라는 카드를 꺼냈다. 스스로에게는 비겁한 방식이었다. 내가 잘못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밤에 이불에 들어가서야 억울함이 몰려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배들도 참 답답했을 것이다. 뭐가 계속 죄송하다는 건지.
어느 날은 내리막길을 걸어가는데 올라오던 분이 내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나는 휘청이며 주저앉아서, 뒤를 돌아 외쳤다. 뭐라고 외쳤을까? “죄송합니다”였다. 맙소사. 무조건 반사처럼 튀어나온 말이었다. 저분이 나를 쳤는데, 왜 나는 죄송하다고 했을까. 습관적으로 ‘죄송함’을 자처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구나.
한 번은 “거기 문방구 아닌가요?”라고 잘못 온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문방구 아니에요. 죄송합니다”라고 답했다. 전화를 끊고서야 내가 그 말을 한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버렸다. 무엇이 죄송했던 걸까. 전화한 사람을 실망하게 한 게? ‘죄송합니다’는 내 무의식 깊이 자리 잡은 듯했다. 결국 나는 포스트잇에 ‘죄송하다는 말 덜하기’라고 써서 달력 위에 붙여 놔야 했다.
그런 내게 동료가 조언을 해왔다. 자신은 죄송하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본인의 잘못일 때도 그 말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순간 어떤 권력 관계가 생긴다는 거다. 그리고 ‘죄송합니다’를 자주 하는 사람은 결국 ‘죄송할 짓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다는 거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동료처럼 살고 싶지도 않았다. 잘못을 빤히 저지르고 모르쇠인 동료를 보면 분통이 터졌다. ‘죄송합니다’ 한마디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 비약적인 두려움을 가진 종족도 존재한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어릴 때는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배우긴 했다. 하지만 나 같은 소인배에게 승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다닌 유치원에는 이름이 알려진 부모님을 가진 친구가 하나 있었다. 어느 날 뛰놀고 있었는데, 친구가 계단을 뛰어오르다 넘어지고 말았다. 그는 엉엉 울기 시작했고 선생님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나 때문에 넘어졌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억울해서 아니라고 했는데, 그때 원장 선생님이 나와버렸다. 원장 선생님은 친구의 말을 듣고 나를 무릎 꿇고 손 들고 있게 했다. 잘못이 없으면서도 용서를 구한 최초의 기억이다. 나는 꽤 억울했던 것 같다. 엄마도 이 일을 또렷이 기억하는 걸 보면.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끝내 스스로에게 미안한 날이 오고야 만다. 나는 나의 ‘죄송합니다’를 찬찬히 해부해 보기로 했다. 내가 주로 언제 그런 말을 쓰는지. 누구에게 그 말을 하는지. 그 안에는 ‘갈등을 빨리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일을 하는데 갈등은 당연한 거니까, 조급함부터 내려 놓기로 했다.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가만히 있어도 별일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어른들의 세계에는 ‘원장 선생님’이 등장하지 않는다. 무릎 꿇고 손들고 있어야 하는 상황도 벌어지지 않는다.
상황을 한마디로 무마하려는 조급함이 없어지자, 나의 상황과 의견을 천천히 설명하는 능력이 생겨났다. 세상은 자신의 페이스대로 이야기하는 여유 있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설명하고 생각한 후에도 내 잘못이라는 판단이 들면, 그때는 깔끔하게 사과하면 된다. 그러면 진짜 이기는 거다. 업무에 자신이 없어서. 혼내는 선배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오늘도 먼저 ‘사과’하고도 이기지 못한 누군가에게 이 ‘리빙뽀인뜨’를 바친다. 정말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면, 사과하지 않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