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 아시안게임 양궁 컴파운드 종목에서 은메달을 딴 주재훈 선수는 ‘직장인 궁사’다. 그는 경북 울진 집 근처 빈 축사에서 매일 혼자 활을 쐈다. 그리고 여섯 번의 도전 끝에 지난해 국가 대표 타이틀을 달았다. 주 선수는 “활을 쏘는 게 너무 재밌다”며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지만 계속 활을 쏘겠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양궁계의 이단아. 서른두 살의 평범한 직장인이자 두 아이 아빠가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가 되기까지 그는 포기를 몰랐다. 주변 그 누구도 상상 못 한 일이었다. 주재훈 선수는 활을 잡은 지 7년 만에 가슴에 태극 마크를 달았다. 그리고 처음 출전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 두 개를 목에 걸었다.

“그냥 너무 재밌었어요. 처음엔 호기심에 국가 대표에 도전했는데 매번 1, 2점 차이로 떨어지니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버려진 축사가 그의 유일한 훈련장이었다. 하늘도 노력에 감복한 걸까. 양궁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동호회 출신인 그가, 전문 교육이라곤 받아본 적 없는 ‘생초짜’가 엘리트로 육성된 선수들 틈에서 아시안게임 메달을 딴 것이다.

주 선수는 월화수목금 청원경찰(한국수력원자력 한울본부)로 일했고 집에선 두 아들의 아빠로 육아를 했다. 주말에는 소를 키우는 부모를 도와 축사에서 소똥을 치웠다. 하지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활시위를 당겼다. 멀쩡한 남자가 화살을 쏘고 다니니 “너무 위험한 거 아니냐” “도대체 뭐 하려고 저러느냐”는 눈총도 받았다. 산으로, 들로 수년간 떠돌이 궁사 생활을 했다. 이유는 딱 하나였다. “활이 너무너무 좋았다.” 주 선수는 경북 울진에서 나고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다. 지난달 18일 고향에서 그를 만났다.

주재훈이 딴 항저우 아시안게임 은메달.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소는 누가 키우냐”며 핀잔 들으며 쐈다

20대 늦은 나이에 활을 처음 잡았다. 그러나 실력은 뒤지지 않았다. 연습 때도, 대회에 나가서도 8점 이하는 거의 쏴본 일이 없다.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빠도 됐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국가 대표였다. 연습 장소가 마땅치 않아 공터를 찾아다닐 때는 “남의 땅에서 뭐하냐”며 혼나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소는 안 키우고 활만 쏘냐”는 아버지의 꾸지람을 피해 산속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2020년 동네 삼촌이 빈 우사를 내줬다. “지붕이 있는 그곳이 저에게는 최고의 양궁장이었죠. ‘양궁에 미쳤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지만 활을 쏠 때는 짜릿해요.”

-어떻게 양궁을 시작했나요.

“어릴 때 TV에서 양궁 경기를 봤는데 너무 신기했어요. 해보고 싶어서 나무를 잘라 활을 만들고 쏴보기도 했지요. 그때부터 관심을 가진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해병대 제대하고 대학 4학년(경북 경산 경일대) 때였어요. 생각이 나서 알아보니 경산에 양궁 컴파운드 동호회가 있더라고요. 그때까진 컴파운드가 뭔지도 몰랐어요.”

-컴파운드는 어떤 종목인가요.

“리커브와는 활 모양 자체가 다르고 원리도 달라요. 컴파운드는 활 양쪽의 도르래로 움직입니다. 리커브보다 빠르고 멀리 나가요.”

-동호회에서 처음 활을 쐈을 때를 기억하나요?

“거의 10점만 쐈어요. 화살이 원하는 위치에 다 들어가는 거예요. 너무 재밌었죠. 장학금 받아둔 걸로 장비를 싹 샀어요. 두 달 만에 대회에 나갔어요. 바로 메달을 땄죠.”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다들 신기해했죠. 7년간 각종 대회에서 딴 메달이 100개가 넘어요. 선수들과 비등한 실력으로 성적을 내니까 관심을 많이 받았죠.”

-그런데 바로 취업을 했더군요.

“양궁은 취미였어요. 좋아하는 것과 밥벌이는 다르잖아요.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했죠.”

-전공은 문헌정보학, 취미는 양궁, 직업은 청원경찰. 공통점이 없네요.

“대학은 성적에 맞춰 갔고요.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은 꿈의 직장이었어요. 사택도 주니 집 걱정도 없고요.”

-취업하고도 양궁을 계속했던데요.

“이런 말 좀 그렇지만, 양궁 입문하고 세 달 후 제 기량은 이미 선수급이었어요. 매일 뒤처지지 않게 연습만 하자 했죠.”

-독학한 건가요?

“유튜브가 선생님이었죠. 이번 우리 대표팀 첫 외국인 감독을 맡은 리오 와일드의 영상을 보고 또 봤어요.”

-연습량은요.

“청원경찰은 교대 근무라 출퇴근이 매일 달랐어요. 출퇴근 전후 시간을 이용해서 하루에 2~3시간씩 연습하고, 주말엔 1~2시간씩 더 했어요. 하루 144발은 반드시 쐈어요.”

-동네에선 싫은 소리도 많이 들었다고요.

“아무래도 위험하잖아요. 화살에 누가 다칠 수도 있고. 충분히 이해했어요. 그래서 요리조리 피해 다녔죠.”

그는 하루에 화살을 144발 쏜다. 144발 전부 10점을 맞춘 날 기념으로 찍은 사진. /주재훈 제공

◇5전 6기로 국가 대표 선발

그는 여섯 번 도전 끝에 국가 대표의 꿈을 이뤘다. “이번 선발전 전날엔 온몸에 알레르기가 올라와서 응급실에 갔어요.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이번에도 힘들겠구나’ 했죠.” 그러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선발된 8명 중 8등으로 겨우 통과했다. “턱걸이로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어요. 회사에는 뭐라고 해야 하나 걱정도 했고요.”

-얘기를 들으면서도 신기해요.

“양궁이 적성에 맞았던 것 같아요. 국가 대표들이 나오는 대회에 나가면 선수들도 저 보고 ‘국가 대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그쪽에선 유명했겠네요.

“양궁계 이단아로 불렸죠.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을 들으니 더 국가 대표가 되고 싶었어요.”

-양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가요?

“멘털이 95%죠. 선수들 실력은 전부 최강이에요. 그런데 대부분 시합에서 무너져요. 즐기는 자가 결국 승자가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저는 돌아갈 곳(직장)이 있어서 마음 편하게 즐긴 것 아닌가 싶어요.”

-국가 대표 선발전에 여러 번 떨어졌는데.

“2016년부터 꾸준히 도전했어요. 간발의 차로 안 되더라고요. 2019년에 결혼을 했고, 2021년은 전날 코로나에 걸려 참가를 못 했어요. 이번에는 ‘연습만 하고 오자’는 심정으로 갔어요. 컨디션이 별로였거든요.”

-그런데 선발됐어요. 기분이 어땠나요?

“울지는 않았고요. ‘드디어 됐구나’ 했죠(웃음).”

<아무튼주말>양궁선수 주재훈(아무튼주말 게재 전 사용금지)-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극심한 슬럼프... 빵점도 쐈다

그는 휴가를 내고 곧바로 진천선수촌에 입촌했다. “국가 대표 8명 중 4명만 평가전을 거쳐 아시안게임에 출전할 수 있었어요. 쉽지 않겠지만 즐기자는 마음이었죠.” 처음 겪어보는 선수촌 생활은 꿈만 같았다. 그동안 비싸서 사지 못한 장비도 마음껏 써볼 수 있었다. 그게 독이었을까. 평가전을 앞두고 ‘빵점’을 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을 마주했다. “감독님이 ‘큰 변화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초심을 생각해 보라’고 하더라고요.” 선발전 때 썼던 활을 다시 잡고서야 아시안게임 출전권을 딸 수 있었다. 이번에도 4등으로 겨우 통과했다.

-선수촌 생활은 어땠나요.

“신기했죠. 가족한테는 미안하지만, 활 쏠 때만큼은 이런 순간이 다시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어요. 훈련할 때마다 너무 좋았어요. 국가 대표들과 함께 뛴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찼죠.”

-엘리트 선수들끼리는 친한데, 소외감은 안 느꼈나요?

“전혀요. 저도 국가 대표 딱지를 단 순간부터 동등한 선수잖아요. 그리고 경쟁에서 안 밀릴 자신이 있었어요.”

-다른 선수들도 신기해했죠?

“누구는 ‘야매 자세’라고 놀렸어요. ‘그렇게 쏘면 안 맞아요’ ‘다시 시작해야 할 정도로 엉망진창이네’라고요. 바꿔보려고도 했는데 못 쏘겠더라고요. 감독님이 딱 한마디로 정리하더군요. ‘다 됐고 10점만 쏘면 돼. 쏘던 대로 쏴.’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멘털 훈련이었던 것 같아요.”

-그 안에서도 경쟁이 심할 텐데.

“아시안게임 출전권을 놓고 또 무한 경쟁이었죠. 제대로 즐길 시간이 없었어요.”

-슬럼프도 있었나요?

“좋은 장비가 많으니까 이것저것 다 해봤어요. 그러다가 낭패를 봤지요. 타깃 조준이 전혀 안 되더라고요. 불안했어요.”

-어떻게 극복했나요?

“국가 대표 선발전 때 썼던 장비로 돌아갔죠. 그게 정답이었어요. 금세 회복됐으니까요.”

소채원(왼쪽)과 주재훈이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 양궁 컴파운드 혼성전 시상식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고 미소 짓고 있다. /뉴스1

◇”메달 색깔은 아쉽지 않아요”

국가 대표 선발, 아시안게임 출전까지 해냈지만 주변에서는 무관심했다. 회사는 휴직계를 받아주면서 처음 겪는 일이라며 난감해했다. “취미겠거니 생각한 것 같아요. 가족도, 동네 사람도, 회사 동료도요. 메달은 기대도 안 했을 테고요.” 평소 무심한 성격의 아버지는 결승전 생중계도 보지 않았다. 지인의 옥수수밭을 갈다가 메달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주 선수는 메달을 자신했다. “불안감은 없었고 자신감만 100%였죠.” 양궁은 현장 예선전을 통해 우리나라 선수끼리 순위를 매겨 남녀 1등이 혼성전, 남자 1~3등이 단체전에 나간다. 그는 여기서 1등을 해 개인전까지 3종목을 뛰었다. 혼성전 은메달, 단체전 은메달을 땄다. 개인전에선 동메달 결정전에서 양재원 선수에게 아쉽게 패했다.

-혼성 종목 결승전 때 전부 10점을 쐈어요.

“몸이 엄청 가벼웠어요. 소채원 선수와 ‘노란 데(10점)만 쏘자’고 했어요. 서로 부담을 안 주려고 대화는 거의 안 하거든요. 서로 ‘끝까지’ ‘자신 있게!’를 외쳐주면서 집중했죠.”

-1점 차 은메달이 아쉽지 않았나요?

“전혀요. 소채원 선수가 10점을 쐈다면 제가 9점을 쐈을 수도 있거든요. 그게 양궁이에요. 비록 졌지만 후회 없이 충분히 잘했다고 생각해요.”

-단체전에선 좀 불안해 보였어요.

“컨디션 난조였어요. 힘이 안 들어가 8점도 쐈죠. 제가 못 쏜 만큼 동료들이 10점을 넣어줘 결승까지 갔어요. 너무 미안했어요. 그래도 동료들이 업어주더라고요.”

-개인전 동메달 결승전 때는 긴장을 많이 하더군요.

“사실 너무 따고 싶었거든요(웃음). 항저우에 갈 때는 ‘하나만 따면 만족’이라고 했는데요.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저보다 양 선수가 잘한 거죠.”

-중국 관중이 야유 보낼 땐 괜찮았나요?

“국제 무대가 처음이다 보니 긴장이 안 될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딱 과녁 앞에 서니까 전혀 신경이 안 쓰이더라고요. 루틴만 생각했어요. 밀고, 걸고, 쭉쭉 당기자.”

-그래서 활을 쏠 때마다 ‘좋아’를 외쳤나요?

“네. 마인드 컨트롤이죠. 자기 주문 같은 거예요.”

주재훈 선수의 양궁 훈련장은 축사였다. 활을 쏘다가 소들에게 사료를 주고 소똥도 치웠다. 그는 “부모님에게, 동네 분들에게 ‘왜 그렇게 화살을 쏘느냐’는 핀잔을 들었다”면서 “그래도 시위를 당길 때만큼은 짜릿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축사 내준 동네 삼촌이 최고 은인

금의환향. 울진에는 주 선수의 은메달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200개 넘게 걸렸다. 동네 스타가 됐다. “예상하지 못해 더 기뻤던 것 같아요.” 그러나 돌아보니 우여곡절이 많았다. 2019년 10월 태풍 미탁은 양궁 장비를 보관하는 주 선수만의 보물섬(컨테이너)을 집어삼켰다. 최악의 재앙으로 기록된 작년 3월 산불 땐 부모님 집과 축사를 잃었다. 가족은 뒤늦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주 선수는 “제가 하는 양궁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원래 말로 하는 사이가 아니라서요. 제 아들이지만 남편으로, 아빠로, 회사원으로 이제 양궁 선수로도 최고”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늘 과묵한 아들이 마음고생을 할까 봐 말은 못 하고 남몰래 울었다.

-양궁을 그만둘 뻔한 일은 없었나요.

“태풍 미탁 때 강수량이 500mm가 넘었어요. 땅이 꺼질 정도였지요. 다음 날 전국체전에 도 대표로 나가야 했어요. 그런데 장비를 넣어둔 컨테이너가 사라진 거예요. 넋이 나간 채로 서 있던 기억이 나네요.”

-어떻게 했나요?

“동네방네 그 비를 다 맞고 찾으러 다녔죠. 잔해도 없었어요. 바다로 떠내려갔다고 하더라고요.”

-망연자실했겠네요.

“장비가 수백만 원 하는데, 와이프한테 털어놨어요. 저는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할 줄 알았어요. 연애할 때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데, 아이가 생기고는 ‘가정에 충실해 달라’는 말을 자주 했거든요.”

-그래서요?

“그런데 바로 ‘괜찮아. 장비 다 사줄게. 다녀와’ 하더라고요. ‘이 은혜 평생 안 잊을게’ 하고 전국체전에 나갔죠. 아내에게 독박 육아 하게 해서 미안해요. 앞으로 잘해야죠.”

-산불 때는요?

“제 장비가 문제가 아니라 그때는 부모님 댁과 축사가 홀랑 타 버렸으니까 막막했죠. 그래도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나 봐요.”

-메달도 땄는데 양궁장 지어준다는 소식은 없나요?

“하하. 못 들었어요. 금메달 땄으면 해주지 않았을까요?”

-가장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

“지금껏 인터뷰에서 가족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축사를 빌려준 동네 삼촌이에요. 그분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또 있나요?

“회사에는 죄송해요. 저 같은 케이스가 없었으니까요. ‘도전해 보라’고 통 크게 배려해 준 것에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아무튼주말> 양궁선수 주재훈 (아무튼주말 게재 전 사용금지)-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시작하지 않으면 결과도 없다

그는 내년 초 ‘직장인 주재훈’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지켜야 할 가정이 있잖아요. 돈도 벌어야 하고요. 하지만 저는 매일 쏠 거예요. 2026년에 나고야 아시안게임이 있고, 컴파운드 종목이 채택이 되면 올림픽에도 도전할 겁니다.”

-선수와 직장인 사이에서 고민이 많을 것 같아요.

“지금은 본업에 충실하고 싶어요. 기회는 있을 때 잡으면 되는 거니까요. 아무래도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저는 가장이니까요.”

-양궁은 계속하나요?

“당연하죠. 이번에 값진 경험을 하며 한층 더 성장했어요. 안 쏘면 실력이 녹슬어요. 아직도 저는 지금보다 잘 쏘고 싶거든요. 일상으로 돌아가도 매일 쏠 겁니다. 저만의 연습장도 있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직장인 메달리스트는 처음인 것 같아요.

“전례에 없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앞으로는 저같이 순수한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도전하는 분들이 생길 거라고 봐요.”

-그런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면 노력은 결코 결과를 배신하지 않아요. 시작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라요.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한 발짝만이라도 시작해 보세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압니까.”

이 ‘직장인 궁사’는 오늘도 활을 쏜다. “선수들 중에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거든요. 그런데 양궁은 나이에 별로 구속받지 않는 운동이에요. 마흔 넘은 오진혁 선수도 있고요. 슬로바키아 보산스키 선수는 마흔여덟인데도 노익장을 과시해요. 저도 10년? 어쩌면 그 이상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쏠 수 있는 한 계속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