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 옆에 잘생긴 근대 건축물이 하나 있다. 명칭은 ‘옛 제일은행 본점’ 건물이고 서울시 유형문화재 71호다. 지금은 공사 중이라 가림막에 가려져 있다. 한옥마을로 잘 알려진 북촌 가회동에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들이 몇 있다. 하나는 ‘가회동 한씨 가옥’이고 또 하나는 ‘백인제 가옥’이다. 탄탄하게 잘 지었고 멋있다. 모두 식민 시대에 만든 집들이다. 한씨 가옥은 서울시 민속문화재 14호, 백인제 가옥은 22호다. 그런데 이들 명칭 뒤에는 희한한 논리가 숨어 있다. 옛 제일은행은 ‘조선저축은행’이 원래 이름이다. 저 ‘한씨 가옥’의 한씨는 한상룡이다. 맞는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전무와 한성은행 전무를 지낸 대표적인 친일파다. ‘백인제 가옥’ 원주인도 이 한상룡이다. 한상룡은 은폐돼 있다. 왜? ‘일제 잔재’며 ‘친일파 이름이라서’.
우선 ‘옛 제일은행 본점’은 ‘서민금융의 전당을 목표로 했던 제일은행 본점 사옥’이다(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에 따르면 1913년 지어진 이 건물은 일제시대와 건국 초기의 격동기를 거치며 최근의 고도경제 성장을 이룩하기까지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 금융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기념비적 건물이다.
거짓말이 섞여 있다. 이 건물은 제일은행이 아니라 ‘조선저축은행’ 건물이다. 그때 제일은행은 없었다. 남대문시장 한가운데 설치된 조선저축은행은 일본인과 일본 자본을 위주로 운용됐다. 해방이 되고 1958년에 현행 제일은행으로 변신해 운영됐고 지금 SC제일은행이 되었다. 신세계가 매입해 매장으로 개조 중이다.
그러니 건물 명칭은 ‘구 조선저축은행 본점’이 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1989년 유형문화재 71호로 지정될 때부터 ‘구 제일은행 본점’이었다. 2009년 이 명칭을 두고 논의가 벌어졌다.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조선저축은행’으로 개칭하자는 논의다. 2009년 2월 5일 서울시는 명칭을 ‘구 제일은행 본점’에서 ‘옛 제일은행 본점’으로 개칭했다. 이유는 이러했다. ‘최초 건립 당시 명칭인 ‘조선저축은행’으로 변경 시 일제 잔재의 의미가 이름에서 강하게 풍기므로.’(서울특별시고시 제2009-38호) 그리고 현재 제일은행 본점과 구분하기 위해 ‘옛’을 넣기로’ 결정했다.
산업은행이 관리하던 시절에 문화재로 지정된 ‘가회동 산업은행관리가’가 ‘가회동 한씨 가옥’으로 바뀌는 데도 곡절이 있다. 해방 때까지 이 집에 살았던 사람은 한상룡이다. 한상룡 이력은 이렇다. 동양척식회사 이사, 한성은행 전무, 조선식산은행 창립위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일본 훈2등 및 훈3등 서보장 서훈.
1940년 ‘한상룡씨 환력기념회’라는 단체가 결성돼 한상룡 환갑을 대대적으로 축하할 정도로 거물이었다. 축하 이벤트 가운데 ‘한상룡을 말한다’라는 단행본 출판이 들어 있었다. 한상룡이 구술한 인생을 정리한 책이다.
그 인생을 구술한 장소가 바로 가회동 ‘한씨 가옥’이다. 구술은 1940년 5월 27일부터 7월 5일까지 30회에 걸쳐 이 집에서 진행됐다. 한상룡은 이 집을 1928년 왕족이던 이달용의 동생 이규용으로부터 2만8000원에 구입해 그해 7월 16일 입주했다.(’한상룡을 말한다’(1940), 김명수 역, 혜안, 2007, pp.275, 518)
이런 내력을 가진 집이 흘러 흘러 1977년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됐다. 당시 이름은 ‘산업은행관리가’였다. 2009년 이 집 이름을 서울시가 ‘한씨 가옥’으로 바꿨다. 바꾼 이유가 묘하다.
‘(한상룡이) 이완용의 조카로 그 자신 또한 적극적 친일 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어 문화재 지정 명칭에 한상룡의 이름 전체를 밝히지 않고 ‘가회동 한씨 가옥’으로 변경함.’(앞 서울시 고시) 집 앞에는 안내판이 없다. 마당 오른쪽에 있는 안내판에는 본채 이름인 ‘휘겸재(撝謙齋)’라는 제목 아래 ‘명칭: 가회동한씨가옥’이라고 소개돼 있다. 이름을 바꾸며 안내판을 교체하지 않고 명칭 부분만 따로 덧씌워져 있다. 한상룡 구술집에는 이 ‘휘겸재’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한상룡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렇다면 북촌 길 건너 백인제 가옥은 무엇인가. 이 ‘한씨 가옥’으로 이사하기 전 한상룡이 24년 동안 살았던 집이다. 1906년 4월 한상룡이 이 집을 구입한 뒤 1913년까지 옆집 열두 채를 사들여 개축했다. 그해 7월 3일 한상룡 가족이 입주한 이 집은 대지 907평에 건평 110평짜리다. 조선총독 같은 권력자들이 드나들었다. 한상룡은 한성은행 자금 부족으로 이 집을 정리해 5만원을 출연하고 길 건너 집으로 이사했다.(앞 책, p135)
이 집 마지막 주인이 백인제였는데, 서울시는 이 집을 문화재로 지정하며 ‘백인제 가옥’으로 명명했다. 이 역시 2009년 한상룡과 역사적 관계를 설명해야 한다는 논란이 있었지만, ‘산업은행 관리가를 ‘가회동한씨가옥’으로 명칭 변경 추진함을 고려하고’ ‘1944년 이후 백인제와 후손에 의해 꾸준히 관리돼 왔으므로’ ‘백인제 가(家)’를 ‘백인제 가옥’으로만 바꿨다. 조선저축은행도 은폐됐고 한상룡도 은폐됐다. 은폐됐으니 일제 잔재도 싹 청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