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영석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 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김현승 시인의 시 ‘눈물’의 전문입니다. 시인은 눈물을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시인에게 눈물은 단순한 생리적 분비물이 아니었습니다. 씨앗이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라는 성경 말씀(마태복음 13:8)에서 영감을 얻은 듯, 눈물은 옥토(좋은 땅)에 떨어져 마침내는 큰 열매를 맺게 할 생명의 표상이었습니다. 또한, 시인은 눈물을 사소한 그 무엇이 아니라 소중한 ‘나의 전체’이자 마지막까지 간직해야 할 가치인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시는 어린 아들의 죽음을 겪은 시인이 그 슬픔을 극복하고,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넘어 종교적 세계로 나아가려는 내면을 형상화한 작품이라지만, 우리에게도 슬픔과 상처를 넘어 순수와 치유의 세계로 인도하는 눈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눈물은 순수합니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슬프고 고통스럽거나 억울할 때 흘리는 눈물보다는 다른 사람을 연민하고 그에 공감할 때 흘리는 눈물은 더욱 그렇습니다. 눈물은 슬픔의 산물이지만 그에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를 겸손케 하며 성스럽게까지 합니다.

총리 재직 시, 언론은 저에게 별명을 여러 개 붙여주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슬비 총리’와 ‘울보 총리’였습니다. 심지어 퇴임 무렵 인터뷰를 한 어느 신문은 제목을 “굿바이, 울보 名재상”이라고 달았습니다. 공직을 마치는 연배의 사람에게 울보라니, 좀 민망했습니다. 그러나 국민과 공감했던 총리라고 평가해주는 것이라고 바꿔 생각해보니 큰 칭찬이겠다 싶었습니다.

신문이 그런 제목을 붙인 것은 총리 재직 중 흘린 몇 번의 눈물 바람이 알려진 탓입니다. 그러나 남이 보기에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장면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뜬금없는 눈물입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습니다. 그 한 예입니다.

2011년 1월 남미 파라과이를 방문했습니다. 그곳 한국 학교를 찾았을 때 학교 측에서 얼마 전에 개최된 학예회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색동옷을 입은 작은 아이들의 재롱부터 큰 아이들의 태권도 시범까지 다양한 공연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파라과이는 1960년대 우리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인지라 많은 우리나라 사람이 농업 이민을 갔던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훨씬 잘살고 있습니다. 재주(?) 있는 사람들은 미국 등지로 빠져나갔지만, 그대로 주저앉아 어려운 여건에서 살고 있는 그들이 안쓰러웠습니다. 학예회 영상을 보고 있노라니 많은 교민, 선생님과 학생들이 조국을 그리워하며 함께 준비하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모두 모여 명절을 준비하던 우리네 옛적 그 모습입니다.

동영상이 끝나고 제가 인사말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목이 메어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침묵의 순간이 길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제 감정을 들키지 않고 인사말을 하여야 한다고 다짐하는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뒤 다음과 같은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이역만리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여러분 감사합니다. 더욱이 우리 아이들이 조국을 잊지 않도록 잘 교육시켜 주셔서 더욱 고맙습니다. 앞으로 서로 단합하여 파라과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잘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도 여러분을 잊지 않고 도울 것입니다.”

어느 신문이 “파라과이 한인 학교에서 학예회 비디오 보다가 울어버린 김 총리”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습니다. ‘울보 총리’라는 별명의 시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