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웨스트할리우드 주택가 한산한 골목에 ‘핑크베리’라는 작은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가게가 들어섰다. 오픈 후 몇 달은 하루 20개를 겨우 팔 정도로 파리가 날렸지만, 차츰 “칼로리가 낮고 건강하면서도 맛있다”는 소문이 났다. “한 번 맛보면 끊을 수 없다”며 마약의 일종인 크랙(crack)과 핑크베리를 합친 ‘크랙베리’라 부르며 하루에도 몇 번씩 찾는 마니아층까지 생겨났다.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 팝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저스틴 팀버레이크, 할리우드 스타 샬리즈 세런, 패리스 힐턴·킴 카다시안 등 수많은 유명 인사가 ‘핑크베리 중독’을 고백했다.
핑크베리는 하루 1000명이 넘게 찾는 명소가 됐다. 손님 대부분은 멀리서 차로 왔다. 종일 이어지는 불법 주차를 견디지 못한 주민들이 LA 시 당국에 “주차 단속을 강화해달라”는 민원을 넣었다. 손님들은 범칙금을 기꺼이 감수했다. LA타임스는 ‘하루 주차 티켓 1000장을 떼게 하는 맛’이라며 핑크베리 열풍을 소개했다.
미국을 넘어 세계 20국 260여 매장을 거느린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제국이 된 핑크베리는 미주 한인 창업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기업이기도 하다. 창업자 황혜경(49)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초고를 졸업하고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사업에 뛰어들어 그야말로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최근 광화문에서 만난 황씨는 “원래는 애프터눈 티를 내는 영국식 티 하우스를 하려 했는데, ABC 라이선스(주류 판매 허가)가 나오지 않아 급하게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으로 돌린 게 이렇게 커졌다”며 웃었다.
◇샘플 돌리며 6개월 버티자 손님이 왔다
-찻집(티 하우스)을 하면서 왜 주류 판매 허가가 필요했나.
“애프터눈 티에 샴페인이나 와인을 한 잔씩 곁들이려 했다. 동네 주민들이 ‘술집은 안 된다’며 반대했다.”
-핑크베리가 대학 졸업 후 첫 사업이었나.
“핑크베리에 앞서 식당을 2번 운영했다. 미국 사람들을 상대로는 뷔페가 답이다 싶어서 패밀리 뷔페 레스토랑에 연이어 도전했다가 홀라당 깨끗하게 망했다(웃음).”
-실패하고도 다시 외식업에 도전한 이유는.
“내 미각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었다. 음식 맛을 잘 알고, 조리도 셰프들보다 더 잘한다는 자신감이 항상 있었다. 자만이었고 착각이었다.”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은 어디서 배웠나.
“식당이 망하고 손실을 메우느라 온갖 일을 했다. 하루에 아르바이트 3개를 뛰기도 했다. 그러다 유럽 기업들과 비즈니스 하는 업체에 입사했다. 유럽 대도시 지하철 노선 지도를 다 외울 정도로 출장을 많이 다녔다. 이탈리아에서 40년 젤라토 장인을 우연히 만났다. 그분을 통해 젤라토 원료 생산자를 소개받았고, 젤라토 만드는 노하우를 배웠다.”
-그리고 바로 핑크베리를 차렸나.
“가르쳐준 이론만으로는 아무리 해도 젤라토가 나오지 않았다. 직접 만들어보며 터득해야 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젤라토를 만들고 버리기를 반복했다. 2년 만에 나만의 레시피가 탄생했다. ‘이제 됐다, 해보자’ 하고 핑크베리를 연 게 2005년 1월이다.”
-초기 몇 달은 손님이 없었다고.
“첫날 매출이 75달러였다.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한 컵에 3.5달러였으니까 고작 20개 판 셈이다. 그것도 동네 사람들이 불쌍하다며 와서 사준 거였다.”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나.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아이스박스에 샘플을 담았다. 동네 가게와 집들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맛보라’고 샘플을 돌렸다. 잡상인 취급 당하며 쫓겨나기 일쑤였다. 인종차별적인 말도 많이 들었다. 1인당 3000~4000달러 받는, 유명 연예인들도 즐겨 찾는 스킨케어 숍이 같은 골목에 있었다. 숍 주인이 경찰에 신고해 끌려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발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면서 샘플을 매일 돌렸다.”
-언제부터 반응이 왔나.
“매출이 하루 75달러에서 150달러, 300달러로 천천히 올라갔다. 어느 날부터 아침에 온 손님이 저녁에 다시 왔다. 그러더니 친구를 데려왔다. 그 친구가 또 다른 친구를 데려왔다. 6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그날도 샘플을 돌리고 가게로 걸어 오는데, 매장 전면이 통유리였는데 매장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뛰어 들어가 보니, 600제곱피트(약 16평)밖에 안 되는 작은 가게가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사람들이 뿜는 입김 때문에 유리에 김이 서린 거였다. 그때부터 가게에 손님이 꽉꽉 들어찼다.”
◇식당 성공하려면 음식보다 문화 알아야
하루 매출은 75달러에서 1만2000달러가 돼 160배로 폭등했다. 가게 문 열기 한 시간 전인 오전 10시부터 줄이 늘어섰다. 문 닫기 15분 전인 밤 10시 45분 직원들이 “이제 닫아야 하니 그만 줄 서라”며 손님들을 쫓아야 했다. 전기를 하도 써서 동네 전체가 단전되기도 했다. 주민들이 “핑크베리 때문에 못 살겠다, 다른 곳으로 나가라”며 시위를 벌였다.
-포기하지 않고 6개월을 버틴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반드시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안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감의 근거는?
“식당 2개를 실패하면서 배운 게 있다. 음식으로 성공하려면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거다. 외식업을 하려는 국가, 도시,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고 거기에 맞춰서 음식 맛이나 서빙 방식 등을 로컬라이징(현지화)해야 성공한다. 그게 진짜 외식업 R&D(연구개발)이다. 요리 잘하는 셰프가 성공하는 게 아니다. 문화를 이해하는 셰프가 성공한다. 나는 그걸 몰라서 망했던 거다. 미국 손님들이 어떤 음식을 선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뷔페 레스토랑을 차렸다가 실패한 거다.”
-식문화를 이해한다는 게 뭔지 예를 든다면.
“한국 사람들은 단맛이 강하면 싫어한다. 반대로 미국 사람들은 달지 않으면 안 좋아한다. 맛에는 온도, 식감까지 포함된다. 이탈리아와 중국 사람들은 차가운 걸 싫어해서 콜라도 미지근하게 마신다. 프랑스 사람들은 콜라 맛이 희석된다며 얼음을 넣지 않는다. 나라마다 우유도 설탕도 모든 게 다 다르다. 이걸 알아야 현지인 입맛을 정조준할 수 있다. 핑크베리가 미국에서 성공했다고 그대로 외국에 들고 가면 필패(必敗)한다.”
-핑크베리는 국가별로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맛을 현지화하나.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카타르 등 중동의 핑크베리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은 특히 더 달다. 이슬람에서 술을 금지하기 때문에 부족한 당·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디저트류가 한국 사람은 현기증 날 정도로 달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다르다. 미국 동부는 서부보다 아이스크림이 조금 더 차가운 걸 선호한다.”
-문화를 이해하는 지름길을 찾았나.
“사람들과 직접 대화하는 게 가장 빠르고 정확하다. 인터넷으로는 한계가 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만나 이야기 나눈다. 음식도 많이 먹어본다.”
-유사 브랜드가 쏟아졌지만 다 사라지고 핑크베리만 남았다.
“비슷하다는 건 실패의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차라리 다른 것, 나만의 독창적인 것을 한다면 가능할 수 있다. 싸다고 해서 팔리지 않는다. 우리 제품이 1달러인데, 비슷한 제품을 90센트에 내놓는다고 소비자가 찾지 않는다. 10센트라면? 아마도. 하지만 비슷한 제품을 10분의 1 가격에 내놓을 수는 없다.”
◇스타벅스 젤라토 다음은 반려견 아이스크림
황씨는 핑크베리를 외식 전문 기업 카할라 브랜드에 2015년 매각하고 현재는 냉동 디저트류 전문업체 ‘핑크베리안’을 운영 중이다. 지난달 22일 스타벅스 코리아가 내놓은 ‘피스타치오 젤라또’와 ‘요거트 젤라또’가 그의 작품. 핑크베리안이 정한 레시피에 따라 위탁 생산해 스타벅스에 공급한다. 그는 “핑크베리와는 자문에 응하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스타벅스에 젤라토를 납품하게 된 계기는.
“스타벅스 코리아에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2년 7개월 걸렸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적당한 단맛에 볶은 피스타치오를 더해 밋밋하지 않고 씹는 맛을 살렸다. 스타벅스 코리아와 일해보니, 미국 본사보다 더 까다롭더라. 한국에서 스타벅스가 잘되는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한국에서 생산한 젤라토를 해외 스타벅스에 수출할 준비도 하고 있다.”
-스타벅스와 인연은 하워드 슐츠 명예회장을 통해서인가.
“2007년 하워드가 먼저 만나자고 연락했다. 그가 많이 도와줬다. 핑크베리에 2750만달러(약 365억원)를 투자했다. 해외 스타벅스 파트너들도 소개했다. 각국 스타벅스 파트너들이 핑크베리를 자기네 나라에 오픈하면서 20국에 진출할 수 있었다.”
-다음은 뭘 준비 중인가.
“반려견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있다. 개에게 좋은 아이스크림이란 뭘까 고민했다. 개는 말을 못하니 반응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먹고서 탈 없이 흡수가 잘되는 아이스크림을 만들자고 결론 내렸다. 동물학 전공 교수 등과 팀을 짜서 오랫동안 연구했고, 곧 제품이 출시된다.”
-고양이용 아이스크림은 안 만드나.
“고양이는 개보다 체온이 낮아서 차가운 음식을 먹을 이유가 없다. 반면 개는 몸에 열이 더 많아서, 얼음을 먹여 보면 고양이보다 좋아하고 빨리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