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廢)역사 철로 위에 한 남자가 누워 있다. “아저씨 거기서 뭐 하세요?” 기차역에 사진을 찍으러 왔다가 우연히 그를 발견한 한 학생이 물었다. “자살하는 중이야.” “예? 여기는 10년 전부터 기차가 안 다니는데요? 거기 눕는다고 어떻게 자살해요?” 물어도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상한 사람이라며 떠난 학생은 그날 저녁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선로에 누워 있던 그 남자가 정말 철로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게 아닌가?
설마 기차에 치여서? 물론 아니었다. 남자의 마지막은 온몸에 상처 하나 없는, 세상 평온한 얼굴로 안식을 맞이한 모습이었다. 그 남자의 핸드폰과 유서가 수습된 이후, 역 근방에 놀라운 소문 하나가 돌기 시작했다. “유서 내용 들었어? 보근역 선로에 누워서 기다리면 아무런 고통 없이 안락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던데?”
내용은 이러했다. 이 역 선로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차분히 기다리면 철로로 내달리는 기적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때 눈을 뜨면 어느새 내 몸은 달리는 열차에 앉아 있고, 평온한 상태로 ‘저세상’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게 된다고 말이다. 외부인은 무시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어쩌면’이라 생각했다. 10년 전 선로 위에서 자살한 김 노인도 평온하고 행복한 표정이었지 않은가? 평생 보근역 관리인으로 살다가 선로와 마지막을 함께한 그가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는 건 아닐지.
뭐가 됐든 역사의 효험은 사실인 듯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두 번째 자살자가 첫 남자와 같은 모습으로 선로 위에서 발견되었고, 세 번째, 네 번째가 이어졌다. 그러자 전국에서 안락한 죽음을 꿈꾸던 사람들이 보근역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처음에는 이 무슨 불온한 사태냐며 불쾌해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이 달라졌다. 자살하러 온 사람들, 자살을 고민하러 온 사람들, 말리러 온 사람들, 그들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인해 지역이 엄청나게 활성화됐기 때문이다. 자살 순례는 매일 이어졌다. 심지어 외국인까지 찾아올 정도였다. 직장이 늘고, 집값이 오르고, 도시에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의 선로 진입을 막아야 하나 고민하던 지자체에서도 이제는 막지 않았다. 그럴듯한 명분도 있었다.
“많은 선진국이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그 사람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모든 인간은 평온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예 지자체에서 파견한 직원이 보근역에 상주하며 관광객을 관리했다. 시스템을 만들고, 고인을 충분히 존중할 수 있는 환경도 형성했다. ‘평온한 죽음을 원하는 자는 보근으로.’ 그것이 하나의 슬로건이 되었다. 이런 행보는 당연히 전국적인 반감을 일으켰다. “사람들의 죽음을 방조하다니! 자살한다면 말려야지, 부추기고 있어? 거긴 사이코패스들만 산답니까?”
옹호 의견도 있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모든 시민은 자기결정권이 있습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토론해도 끝이 안 날 주제였다. 결국 국가 차원에서 나서는 게 맞았는데, 국가는 당연히 국민의 자살을 방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자체가 온전히 따를 리 없었다. “그동안 국가가 우리 지역에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오죽하면 그러겠어? 까놓고 말해서 평소에는 지방의 잊힌 소도시 따위 신경도 안 쓰면서 무슨. 우리가 다리 깔아달라는 요청만 몇 년을 했는데, 그건 다 무시하다가 이런 일은 참 빨리도 나서네.” 보근의 부흥을 내세운 강경 단체가 출범해 정면으로 국가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욕을 먹더라도 그게 그들이 사랑하는 고향을 위한 대의라고 생각했다.
호황은 영원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긴 것이다. “어… 안 죽는데요?” 선로에 종일 누워 있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닌가? 안락사의 효험이 사라진 것이다. 누군가는 혹시 기차 정원이 꽉 찬 게 아니냐고 추측했다. 지자체는 당황했다. 왜 안 죽지? 죽어야 하는데? 죽어야 사람들이 오고 보근이 계속 부흥할 텐데? 소문은 빨랐다. 급속도로 방문객 숫자가 줄어들었다. 지자체는 초조해졌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투자 중인 인프라는? 맺어놓은 계약이 얼마나 많은데? 모여 제사라도 지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다시 죽여 달라고(?) 말이다.
도시가 시들해지던 어느 날, 다시 소문이 돌았다. “보근역의 평온한 죽음이 다시 시작됐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다시 선로 위에서 자살을 기다린 사람들이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다시 또 전국에서 사람들이 보근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아졌다. 언제 또 효험이 사라질지 모르는데, 고민할 시간에 빨리 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강경 단체는 흡족하게 다시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다만, 이전과 달리 한 과정이 추가됐다. 그들은 선로 위에 누운 자살 시도자에게 다가가 마지막으로 ‘후회하지 않느냐’ 물은 뒤, 팔에 주사를 놓았다. 안락한 마지막을 도와주는 주사를 말이다. 그렇게 죽음은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