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장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제가 한 일이 가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3일 영국 런던의 유명 축구 구단인 아스날 홈 구장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앞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1996년부터 2018년까지 22년간 아스날을 지휘한 아르센 벵거(73·프랑스) 감독의 동상이 지난달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앞에 세워졌는데, 이날 벵거 감독이 구장을 방문한 것이다.

아스널을 22년간 지휘한 아르센 벵거 전 아스널 감독이 지난 3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에 있는 아스널의 홈 구장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앞에 세워진 자신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아스널 구단 공식 트위터

이날 벵거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그의 동상이 선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이 감독 시절 자신을 줄곧 괴롭힌 당사자기 때문. 하지만 최근 들어 아스날이 뛰어난 선수 영입과 경기력으로 ‘우주 최강’ 맨체스터 시티(맨시티)를 위협할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르면서, 신축 구장 건설에 기여한 벵거의 업적도 재평가받고 있다. 축구 평론가들은 “재임 시절 아스날의 미래를 내다본 벵거의 희생이 이제 빛을 발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패 우승’ 감독이 짠돌이가 된 사연

벵거가 오기 전 아스날은 영국 1부 리그에서 7~8위를 하던 중상위권 팀이었다. 1996년 J리그를 평정한 그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아스날은 유려한 패스워크를 기반으로 한 ‘예술 축구’로 영국 프리미어 리그(EPL) 우승 3번, 영국 FA 컵은 7번을 우승하는 EPL의 대표적인 강팀으로 부상했다. 2003~2004년 시즌 단 한 경기도 패배하지 않고 우승한 ‘무패 우승’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불멸의 업적이다. 티에리 앙리, 데니스 베르캄프 등 전설적인 선수들이 벵거의 손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부임 10년 차인 2006년부터 아스날은 서서히 내려앉아 ‘만년 4위’가 됐다. 2003년 러시아 석유 갑부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첼시를 인수하고, 2008년에는 만수르가 맨시티를 인수하며 EPL에는 막대한 오일 머니가 쏟아지던 상황. 그런데 아스날은 반대로 허리띠를 더 졸라매고 팀의 주축 선수들을 라이벌 팀에 내다 팔았다. 스타 영입 대신 저렴한 유망주 영입과 유소년 육성에 매달리는 벵거는 ‘교수’라는 별명 대신 ‘짠돌이’로 불리게 됐다.

속사정이 있었다. 벵거는 훗날 “아스날의 더 큰 미래를 위해선 구장 신축이 필요했고, 그걸 짓느라 돈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아스날은 1913년부터 홈 구장으로 쓰던 객석 3만8000명 규모의 하이버리 대신 6만여 명을 수용하는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을 지어 2006년에 이전했는데, 그 과정에서 공사 비용 등 수억파운드의 부채를 떠안았다. 벵거 감독은 “당시 부지 매입에만 1억2000만파운드, 구장 건설에 약 4억파운드가 들어갔다”며 “현재 가치로 7억파운드(약 1조2000억원)가 든 것”이라고 했다.

당시 은행은 아스날에 신축 구장 비용 2억6000만 파운드를 대출하면서 “선수에게 지급되는 급여 예산이 구단 전체 예산의 50%를 넘기면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동시에 은행 부채 상환을 위해 아스날이 5개 시즌 중 3개 시즌에서 리그 4위 이상을 기록해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해 중계권 수익도 확보해야 했다. 늘 우승 경쟁을 하던 감독에게 급여 높은 스타 선수를 내다 팔고, 동시에 리그 4위 이상을 꾸준히 확보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무리한 요구 앞에 선 벵거에게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바이에른 뮌헨 등 대형 클럽들이 감독직을 제의했지만, 벵거는 다 거절하고 아스날의 신축 구장 프로젝트를 완성시켰다. 핵심 선수를 다른 구단에 팔면서도 5개 시즌 내내 리그 4위로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다. ‘더 많은 관중을 수용할 신축 구장을 지어야 장기적으로 더 많은 수익을 벌어 아스날을 더 큰 구단으로 만들 수 있다’는 비전, 그리고 아스날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충성심 때문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스타 선수들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나는 어린 선수들을 육성해야 했다”며 “(구장 이전을 위해) 7년 정도 구단의 생존을 위해 싸웠다. 그 기간 동안 열심히 노력했지만 미디어와 팬들은 우리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과거와 같은 성과를 얻지 못하는지 압박을 당했다”고 말했다. 2013년부터 구단의 재정이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그 사이 ‘만년 4위’로 추락한 위상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고, 벵거는 결국 아스날을 떠나야 했다.

◇'더 먼 미래’를 내다본 벵거의 리더십

현재의 영광보다 미래를 택한 벵거의 희생과 노력은 결코 헛수고가 아니었다. 2019년부터 아스날을 맡은 미켈 아르테타(41·스페인) 감독이 지난 시즌부터 감독으로서 잠재력을 꽃피우며 아스날을 리그 2위로 끌어올렸다. 시즌 초부터 중후반까지 리그 1위를 달리며 ‘우주 최강’ 맨시티를 밀어냈지만, 시즌 막판 맨시티에 아쉽게 역전 우승을 허용했다.

이번 시즌 팬들의 기대는 더 커졌다. 아스날이 오일 머니를 앞세운 빅클럽 못지않은 씀씀이로 초대형 선수들을 연달아 영입했기 때문. 특히 이번에 잉글랜드 대표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꼽히는 데클런 라이스를 영입하며 1억500만파운드(약 1780억원)의 이적료를 지출했는데, 역대 단일 영국 축구 선수로는 최고 액수다. ‘짠돌이’로 놀림받던 아스날이 이제 이적 시장의 큰손으로 자리매김한 것. 외신과 평론가들은 “최근 EPL과 챔피언스리그 중계권 수익이 천정부지로 오른 영향이 있지만 신축 구장 건설과 건전한 재정 운용으로 오일 머니에 기대지 않고도 막강한 재정력을 갖춘 덕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번 시즌도 맨시티를 위협할 강력한 후보로 아스날이 꼽힌다. 현재 아스날을 이끄는 아르테타 감독과 에두 가스파르(45·브라질) 기술 이사는 현역 선수 시절 벵거 감독이 영입해 그의 지도 아래 아스날에서 활약했다. 아스날을 이끄는 리더십마저 벵거가 남긴 ‘위대한 유산’인 셈이다. “새 구장 건설에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죠. 구장을 짓는 과정에서 재정난 때문에 우승이라는 야심을 충족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미래의 일은 미래 세대의 것입니다. 지금 아스날은 아주 건강한 상태로 새로운 야심을 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