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무릎 꿇을 수 없다.

그래서 여경 준비생 김민정(23)씨는 곧장 경찰 체력 전문 학원에 등록했다. ‘팔굽혀펴기’ 때문이다. 올해 하반기부터 경찰 공무원 체력 시험에서 여성 응시자의 팔굽혀펴기 자세가 ‘정자세’로 바뀌어 마음이 급해진 까닭이다. 종전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상체만 까딱까딱 내렸다 올리는 ‘여성 배려형’ 자세였다. 여자는 힘이 약하니까. 그러나 남녀 차별이라는 반발이 거세지고, 흉악 사건은 늘었으며, 범죄 현장에서 여경의 미흡한 대응 등이 논란이 되면서 체력 시험 조건이 달라졌다. 12년 만이다. 김씨는 “이번이 두 번째 응시인데 규정이 달라진 뒤로는 처음이라 긴장된다”며 “정자세는 상체뿐 아니라 온몸을 다 써야 해 두 배 더 힘들다”고 말했다. 필기 합격자를 대상으로 다음 달 초부터 전국적인 체력 테스트가 치러진다.

◇팔굽혀펴기, 평등의 척도

지난달 말 서울 노량진의 공무원 체력 학원에서 여성 수강생들이 팔굽혀펴기 연습을 하고 있다. 흐느적대지 않고 예상보다 안정적인 자세로 반복 운동을 수행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지금 서울 노량진 수험가는 가장 뜨거운 시기다. 금요일 밤, 체력 학원에서 얼굴이 벌게진 여성 10여 명이 일렬로 ‘엎드려뻗쳐’ 자세를 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경찰이 되고자. “조금만 더!” 처음에는 제한 시간 1분간 버티기만 한다. 그 다음 몸에 고무 밴드를 감고 보조자가 잡아준 상태에서 반동을 이용한 팔굽혀펴기. 그러다 조금씩 팔에 근육이 붙으면 혼자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식으로 점진적 과부하를 통한 훈련이 이뤄진다. 피니쉬공무원체력학원 이혜현 실장은 “팔굽혀펴기 규정이 바뀌면서 여성 수강생 숫자가 두 배 가까이 늘었다”고 말했다.

경찰 시험 체력 종목에는 100m 달리기·윗몸일으키기·악력도 있다. 그중 팔굽혀펴기가 유독 난리인 이유는 1인분 몸무게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지 입증할 완력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에는 단 한 번도 팔굽혀펴기를 해본 적이 없다”는 수강생이 상당수였다. 이지은(29)씨 역시 마찬가지. “필기시험보다 팔굽혀펴기가 더 큰 고민거리였을 정도”라고 했다. 1분 동안 31개를 해야 10점 만점을 받는다. 남자(61개)의 절반 수준이긴 하나 결코 만만한 개수가 아니다. “위기 대처에는 물리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죠. 남녀의 신체 차이를 완벽하게 극복할 수는 없겠지만 일정 수준은 맞춰야 한다고 봐요. 준비가 힘들어졌어도 이렇게 바뀌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몇 달간 매일같이 연습에 매진한 이씨는 팔굽혀펴기를 20개 넘게 할 수 있게 됐다.

◇여경 아닌 경찰로 인정받고파

2016년 순경 채용 체력 시험 당시 한 여성 응시자가 안간힘 쓰며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상체만 내렸다 올리는 자세다. /조선일보DB

이날 체력 학원에서 만난 수강생 대부분은 “바뀐 규정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나약하다는 오해에 계속 시달리느니 차라리 남녀 공평한 기준이 낫다”는 것이다. 2011년 경찰청은 체력 반영 비율을 10%에서 25%로 높인 뒤, 처음 팔굽혀펴기를 시험 종목으로 도입했다. ‘약골’ 경찰을 줄이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여성은 무릎을 대고 팔굽혀펴기를 했다. 당시에도 낯선 풍경이었다. 같은 여자여도 여군은 정자세로 시험을 치르기 때문이다. 여경에게만 주어진 특례였던 셈이다. 구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2019년 ‘대림동 사건’이 결정타가 됐다. 출동한 여경이 조선족 취객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는 듯한 영상이 소셜미디어로 퍼져나갔다. 약한 경찰은 필요없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제도 개선 요구가 빗발쳤다.

미국·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경찰관 채용 시 남녀 기준이 동일하다. 싱가포르는 성별 아닌 연령별 차등 기준으로 체력을 평가한다. 국내 여경 최초로 강력계 형사로 일하며 숱한 잔혹 사건을 해결한 ‘여경의 전설’ 박미옥(55)씨 등의 사례도 현장 능력이 성별과는 큰 관련이 없음을 보여준다. 유튜브에는 완벽한 자세로 푸시업을 수행하는 여성들의 연습 영상이 연달아 올라오고 있다. “바닥 밀어내면서 올라왔을 때 짜릿함.” 하면 된다.

◇여경 2만명 시대의 여경 무용론

수험생에서 경찰관으로. 다음달 체력시험 및 면접을 거쳐 합격자는 경찰 제복을 입게 된다. 책상을 벗어나 범죄와 맞서 싸우게 된다. /경찰청

“이분이 오늘 회사 체력 검정 날인데 진단서 내고 오셨답니다.” 지난 5월 SBS 라디오 ‘컬투쇼’ 진행자가 현장 방청에 참여한 한 여성을 소개했다. 직업을 묻자 “경찰공무원”이라고 여성은 답했다. 그러자 한 출연자가 “경찰공무원이 거짓말하고 가짜 진단서 내고(왔다는 거냐)”라고 되물었다. 청취자의 비난이 쇄도했다. 다만 해당 발언과는 달리 이 여경은 전날 체력 검정에 정상 참여한 뒤 녹화장에 간 것이라고 경찰 측은 해명했다. 그러나 전국에 송출되는 방송에서 재미를 위해 가벼이 입을 놀린 모양새가 되면서, 여경의 품위 손상을 자초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불신은 커지고 있다. 통제가 급한 상황에서 여경이 ‘뒷짐’ 지고 있는 사진이 찍혀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어떻게 해’만 연발한다며 여경 무용론을 조장하는 혐오적 멸칭 ‘오또케’(Auto-K)까지 생겨난 형국. 경찰 내부에서도 싸늘한 시선이 적지 않다. 대림동 사건 직전 ‘경찰대학·간부 후보 남녀 통합 선발을 위한 체력 기준 마련’ 조사 보고서가 공개됐다. ‘여성 경찰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문항에서 남성 경찰의 38.7%가 부정적이었다. ‘경찰 업무상 여성 경찰이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 한다’는 문항에서도 남성 경찰 72.6%, 여성 경찰 52.9%가 부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역대 최대, 여경 2만명 시대의 그림자다.

◇약한 여경? 최초 여경은 독립운동가

1956년 서울여자경찰서 단체 사진. 여성으로만 구성된 국내 최초의 여성경찰서였다. /경찰박물관

그러나 여경은 결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최초의 여경은 해방 직후 1946년 공안국에 여자경찰과가 신설되면서 등장했다. 이듬해 여경 80명으로 구성된 ‘서울여자경찰서’가 세종로에 세워져 10년간 범죄를 소탕했다. 부녀자를 수색하고, 여성 범죄 정보를 처리하고, 불우 아동 및 청소년을 지도했다. 초대 서울여자경찰서장 양한나 경감은 상하이와 부산을 오가며 독립 자금을 전달한 독립운동가, 만삭의 몸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5대 서장 안맥결 총경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딸이다. ‘나약한 여경’과는 거리가 멀다.

2026년부터 순경 공채 체력 시험은 남녀 통합 기준으로 치러진다. 방식도 팔굽혀펴기 등 ‘종목식’에서 ‘순환식’으로 바뀐다. 응시자는 4.2㎏ 무게 조끼를 입고, 장애물 코스 달리기·장대 허들 넘기·밀고 당기기·구조하기·방아쇠 당기기 등 6개 코스를 제한 시간 4분 40초 안에 완주하면 된다. 실전에서의 자질 평가를 위해 뉴욕 경찰 테스트를 참고했다는 설명. 그러나 기존보다 변별력이 작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방아쇠 당기기’의 경우 실효성이 떨어진다며 경찰청 인권위원회가 개선을 권고했을 정도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모든 경찰 업무가 힘쓰는 일은 아니지만 현장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남녀를 떠나 경찰에 지원하는 사람이라면 ‘왜 경찰이 되려 하는가’를 자문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