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들어도 설레고, 상상만 해도 기분 좋은 말이다. ‘여름휴가’. 직장인들이 사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여름휴가 하나만 바라보고 1년을 버틴다” “여름휴가 없었으면 회사 못 다녔다”는 고백이 넘쳐난다.
평소엔 길게 쓰기 어렵던 휴가를 눈치 안 보며 쓸 기회다 보니, 휴가철엔 여행이 ‘국룰(일반적 규칙)’처럼 여겨진 지 오래. “휴가 때 어디 가?”라는 말이 인사말처럼 통용되고, 온갖 데서 ‘올여름 꼭 가야 할 피서지 5곳’ ‘여름휴가 여행 트렌드 3가지’ 등의 추천을 볼 수 있다. 10년 전 문화체육관광부 ‘하계휴가 실태조사’로 본 K직장인의 평범한 휴가는 이랬다. ‘7말 8초(7월 말부터 8월 초)’에 2박 3일간 자가용을 이용하고 펜션에서 묵는 국내 여행. 5월 말 실시된 당시 조사에서 ‘휴가를 이미 다녀왔거나, 계획을 잡았거나 혹은 다녀올 가능성이 높다’고 응답한 비율은 62.7%에 달했다.
하지만 올해는 전통적인 휴가를 포기하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름하여 ‘휴포자(휴가 포기자)’다. 이달 초 온라인 조사업체 피앰아이가 전국 성인 3000명을 조사해 보니, ‘여름휴가 계획이 있다’는 응답은 27%에 그쳤다. 계획이 없거나(36.8%) 미정(36.2%)인 사람이 전체의 73%. 커리어 플랫폼 잡코리아가 직장인 65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도 비슷한 결과였다. ‘여름휴가를 떠날 예정’이라고 답한 이는 27.4%에 그쳤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린 2021년 같은 조사에서 여름휴가를 가겠다는 응답자의 비율(42.2%)보다도 적은 수치다.
◇종잡을 수 없는 이상기후… “귀한 휴가를 왜 망치나”
8월 초 아내와 강원도 정선으로 여행을 가려던 직장인 조모(35)씨는 지난주 숙소 예약을 취소했다. 전국에 쏟아진 폭우로 인명 피해가 속출하자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8월 초면 수해 복구도 다 안 됐을 것 같고, 이번 주말부터 또 비가 쏟아진다고 하니 걱정이 앞서 여행을 포기했다”면서 “누구는 목숨을 잃었고 이재민도 많아 휴가 갈 기분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동남아 휴양지를 고민하던 회사원 이지영(50)씨 가족도 이번엔 여행을 가지 않기로 했다. 그는 “수해 피해를 본 분들이 많고, 매일같이 물난리 뉴스가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여행을 떠나기는 미안한 마음”이라고 했다.
폭우와 폭염이 교차하고, 일기예보가 수시로 바뀌어 날씨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도 여행을 꺼리게 되는 이유다. 많은 이들이 어렵게 휴가를 냈는데 날씨 때문에 호텔에만 머무르며 시간을 허비할까 봐 우려한다. 이상기후는 국내에만 한정된 게 아니다. 북미와 유럽, 아시아 곳곳이 엉망이다.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보낼 생각이었다는 회사원 김중호(41)씨는 현지 기온이 38도에 육박한다는 뉴스를 보고 계획을 접었다. 그는 “위약금이 아깝긴 하지만, 귀한 휴가 때 한국보다 더 더운 곳에 가서 생고생할 것 같아서”라고 했다.
‘기후 우울증’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기후 우울증은 기후위기로 불안, 스트레스, 무기력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나타나는 심리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공무원 김모(36)씨는 “극한 기후에 대한 뉴스나 사진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며 ‘플뤼그스캄(flygskam·비행기 여행의 부끄러움이란 뜻을 가진 스웨덴어)’ 캠페인에 동참한다고 했다. 플뤼그스캄은 엄청난 양의 탄소를 배출하는 비행기를 타지 말고 기차 등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자는 것. 김씨는 “비행기를 타고 내가 놀러가는 행위가 지구에 미치는 악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며 ‘집콕 휴가’를 선언했다.
◇치솟은 물가에… “너무 비싸서 갈 엄두가 안 나”
천정부지로 오른 물가도 휴포자를 양산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콘도와 호텔 숙박료 등 휴가 관련 물가가 대폭 인상됐다. 콘도는 지난해 동월 대비 13.4%, 호텔 숙박료는 11.1%, 해외 단체 여행비는 5.2% 올랐다. 외식 물가도 작년 같은 달보다 6.3% 상승. 피앰아이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휴가를 포기하는 이유에 대해 ‘일정 조율이 어렵다’(35.4%)와 함께 ‘비용 부담’(34.8%), ‘생업상의 이유’(17.5%)를 꼽았다.
여덟 살 쌍둥이 아들을 둔 40대 직장인 최모씨는 당초 엔데믹 이후 첫 여름휴가에 돈을 넉넉히 쓸 생각이었지만, 너무 비싼 항공권과 숙박비에 마음을 돌렸다. 그는 “해외는 항공권이, 국내는 숙박비가 너무 비싸서 엄두가 안 나더라”고 했다. 최씨가 알아본 부산의 한 호텔(17평 객실 기준)은 평소 주말 1박 40만원대였는데 7말 8초에는 150만원을 넘어선 가격이었다. 근교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비슷했다. 평소 주말 1박 15만원대였던 경기도의 한 풀빌라는 50만원대로 3배 이상으로 치솟았다. 그는 “일찍 알아보고 예약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너무 (성수기와 비수기 간) 격차가 커서 이 가격으론 휴가를 가기 어려울 것 같다”며 “여행은 가을 이후로 미루고 근교 수영장이나 도서관에서 가성비 좋은 휴가를 보낼 생각”이라고 했다. 회사원 박모(36)씨는 “해외든 국내든 간에 4박 5일 여행 간다고 생각하면 교통비, 숙박비, 외식비 다 합해서 많게는 두 달 치 월급쯤 되겠더라”면서 “돌고 돌아서 결론은 떠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휴가 때 쓰려던 돈으로 평소 사고 싶었던 게임기를 살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20대 직장인 구모씨는 얇아진 지갑 때문에 휴가를 반납했다. “여름엔 회사가 가장 쾌적한데, 회사는 돈까지 준다”는 게 그의 말이다.
휴가철 바가지요금도 여행 갈 마음을 싹 사라지게 하는 주범이다. 최근 잇따른 지역 축제 바가지 논란에 정부와 지자체가 바가지 근절에 나섰지만, 일부 상인은 여전히 턱없는 가격을 부르고 있다. 경기도 한 유원지 인근 식당은 닭백숙을 11만원에 팔고, 강원도 한 해수욕장은 파라솔 대여료와 샤워비로 각각 5만원, 1만원을 받고 있다. 여섯 살 딸을 둔 직장인 황모(36)씨는 “한철 장사로 폭리 취할 생각만 하는 악덕 상인들 때문에 기분이 상할 게 뻔한 휴가를 가고 싶지는 않다”며 “마당에 가정용 풀장을 설치해 아이와 안전하게 ‘홈터파크(홈+워터파크)’를 즐길 계획”이라고 했다.
◇집콕족은 “빈지 워칭, 북캉스 할게요”
별다른 이유 없이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 집에서 머무는 게 좋다는 ‘홈캉스(홈+바캉스)족’도 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휴가 시 특별한 활동을 해야 만족스러운가’란 질문에 ‘전혀 그렇지 않다’ 등 부정적 답변이 2017년 16.2%에서 2021년 29.7%로 크게 늘었다. ‘매우 그렇다’ 등 특별한 활동을 해야 만족스럽다는 답변은 같은 기간 58.7%에서 44.8%로 줄었다. 인스타그램에 ‘홈캉스’라는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은 12만개가 넘는다.
8월 첫 주에 닷새 휴가를 낸 미용사 전모(29)씨는 “반려묘와 놀면서 ‘홈트(집 안에서 하는 운동)’로 다이어트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열심히 일하고 얻은 휴가이므로 가장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집에 있는 게 가장 좋은 사람”이라면서 “간혹 ‘왜 해외여행 안 가느냐’며 ‘여행부심(여행+자부심)’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전씨가 활동하는 2030 ‘집콕족’ 오픈채팅방에서는 ‘멍 때리기’ ‘디지털 디톡스’ ‘동네 산책’ 등의 휴가 계획이 공유되고 있었다.
휴가 때 영화나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을 몰아보는 ‘빈지 워칭’, 바쁜 일상에 쫓겨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을 쌓아놓고 보는 ‘북캉스(북+바캉스)’를 벼르는 이들도 많다. 대기업 직원 신모(38)씨는 “집에서 배달 음식 시켜 먹으면서 ‘나르코스’ ‘브레이킹 배드’ 등 범죄 시리즈물을 정주행하고, 히가시노 게이고 등 책장이 바삐 넘어가는 소설을 여러 권 읽을 계획이라 설렌다”고 했다. 넷플릭스 등 OTT 서비스들은 휴가 시즌에 맞춰 기대작들을 공개할 예정이다. 몰아보기 좋은 시리즈도 추천 중이다. 출판사, 도서관들도 속속 ‘휴가철 읽기 좋은 책’ ‘올여름의 북큐레이션’ 등 추천 도서 목록을 선정, 발표하고 있다.
식품·유통 업계 등에서는 휴포자들을 겨냥한 상품을 출시하고 있다. C식품기업은 유명 여행지 맛집 레시피를 활용한 밀키트를, G호텔에서는 휴포자를 위한 최저가 숙박 패키지를 내놨다. 한 온라인 쇼핑 플랫폼은 영상·음향 가전, 계절 가전과 홈웨어 등을 할인 판매하는 홈캉스 기획전을 열었다.
이은희 인하대 교수는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밴드왜건(동조효과) 경향이 강한데, 특히 과거에는 ‘여름휴가 때 남들 다 여행 가니까 나만 안 가면 안 된다’란 인식이 팽배했다”면서 “소셜미디어 발달 등으로 다양한 휴가 스타일이 공유됐고, 어디를 가지 않더라도 근사한 휴가를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집콕 휴가’ 등이 각광받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