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상상을 해보자. 세계 20억명이 사용하는 인스타그램. 당신도 사용자 중 한 명이다. 남들처럼 여행을 떠났고, 그곳 사진들을 촬영했으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진을 올렸다. 가끔 사진을 보고 ‘좋아요’를 누르는 모르는 팔로어가 있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지구 반대편 9595㎞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다이렉트 메시지(DM)로 “당신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들로 전시를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농담 같기도 했지만, 흔쾌히 “오케이”를 외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그곳에서 생애 첫 전시가 열렸다.
2021년 서울에서 관람객 40만명을 모은 주인공, 그 전시를 보기 위해선 2시간 넘게 줄을 서야 해 ‘전시 오픈 런’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출신인 요시고(본명 호세 하비에르 세라노 에체베리아·42)의 이야기다. 당시 그의 전시를 기다리는 줄로 그라운드시소 서촌 일대는 교통이 마비됐고, 여행 사진전 붐이 일었다. 정려원·박기웅 등 스타들도 앞다퉈 방문해 “MZ세대가 사랑하는 사진작가”라는 말을 들을 만큼 큰 성공을 거뒀다.
그 요시고가 부산에 등장했다. 생애 두 번째 전시가 이 항구도시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서울 전시 때는 코로나 기간이라 방문하지 못했지만, 아쉬울 필요는 없었다. 이번 전시가 열리는 부산진구 KT&G 상상마당 주변도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길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환호하는 팬들 사이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이 남자를 만났다.
◇지구 반대편에서 깜짝 스타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사전 정보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이 전시를 기획한 지성욱 미디어앤아트 대표는 코로나 기간에 여행길이 막혀 여행 사진전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행 사진작가 세 명을 접촉했는데 가격이 너무 비쌌다. 고민에 빠진 그에게 20대 직원이 인스타그램 하나를 보여줬다. 평소 즐겨 보고 있었다는 요시고의 사진들이었다. 색감이 화려하고 구성이 감각적인 그의 사진에 지 대표도 빠졌고, 그 직원은 바로 요시고에게 인스타그램으로 “전시를 하자”는 DM을 보냈다.
-그 DM을 처음 봤을 때 놀라지 않았나요.
“농담인 줄 알았어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거든요. 두 번째 연락은 메일로 기획안이 왔어요. 너무 방대해서 ‘이게 가능할까?’라는 생각부터 했죠.”
-당신의 사진을 보기 위해 많은 한국 사람이 오랜 시간 줄을 서 기다렸는데.
“믿을 수 없었어요. 눈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 몰라요. 가끔 인생에서 꿈은 꾸지만, 현실로 이뤄질 것 같지 않은 환상적인 일들이 있잖아요? 제겐 이 일이 그래요. 주변에서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전시 전 한국에 대해 좀 알았나요?
“스페인에서 한국은 유명해요. 예전에는 일본 가는 게 유행이었다면, 지금은 한국이 그래요. 전 이번이 첫 방문이긴 하지만 이 나라를 잘 알고 있었고 오고 싶었어요.”
-와보니 첫인상이 어떻던가요.
“제가 알던 한국은 기술적인 분야에서 굉장히 선진적인 나라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정작 제 마음을 끈 것은 경복궁, 시장 등 전통적인 것들이었어요. 이태원·홍대·강남에서는 다양한 서울의 모습을 알게 됐고요. 빨간색·파란색·노란색 의자 같은 단색이 많이 보이는 것도 놀라워요. 지금 한국에서는 단색 아이템을 중심으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서울 전시 전후로 삶이 어떻게 바뀌었나요?
“일단 팔로어가 10만명 넘게 늘었어요. 대부분 한국인이에요. 전 전업 사진가이기 때문에 전시회 전에는 상업용 홍보 사진을 주로 찍었어요. 예술적인 개인 사진을 찍는 비율은 한 20%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 비율이 훨씬 더 커졌어요. 이번 전시의 성공을 계기로 제가 추구하는 예술적인 사진을 더 많이 찍어도 되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요시고’
-어릴 때 꿈이라면.
“레알 소시에다드 축구 선수요! 한때 한국인 선수(이천수)도 있었어요.”
-사진작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진기를 가지고 놀면서 찍었어요. 엄청 전문적인 기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좋은 거였는데, 아버지가 마음껏 갖고 놀게 해주셨죠. 그러던 어느 날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제게 시 한 편을 써주셨어요. ‘멈추지 말고 계속 전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천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내용이에요. 그 시는 제가 사진에 재능이 없다고 느낄 때마다 용기를 줍니다. 제 활동명인 요시고도 그 시에 등장하는 글귀예요. ‘계속 나아가다(Yo sigo)’라는 뜻이지요. 익명성이 예술인의 삶과 개인의 삶을 분리한다고 생각해 활동명을 사용해요.”
-아버지도 사진작가인가요?
“아니요. 금융 분야에서 일하세요. 그래도 취미로 시나 글을 쓰는 걸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심지어 저를 혼내는 순간에도요. 어릴 때 몰래 술 마시고 취해서 집에 들어오거나, 학교 성적이 잘 안 나오면 보통 아버지들은 훈계를 하잖아요? 저희 아버지는 하고 싶은 말을 시로 표현해 주셨어요. 좀 더 친숙하고 어렵지 않게, ‘알코올’ 같은 단어들의 라임도 맞춰서요(웃음). 재미있지만, 아버지가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 있었죠.”
-대학 전공은 광고홍보학과였다고요?
“네, 세부 전공으로는 그래픽 디자인을 했어요. 2004년에 취직해 5년간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지요. 그 시절에는 휴가 때만 사진을 찍었어요. 그러다 그래픽 디자인보다는 사진이 더 좋다는 걸 알게 됐지요. 그래서 그래픽 디자인 일을 그만뒀어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좋은 사진이 나오는 곳으로 직접 가는 것이 중요했거든요. 시간을 많이 확보해야 했지요.”
◇카메라를 가진 모두가 작가
-전업 사진가의 삶은 어땠나요?
“모험의 연속이었어요. 두바이에서 모래 사막을 촬영한 적이 있어요. 같은 모래 사막도 빛에 따라 느낌이 다 달라요. 좋은 빛과 느낌을 따라 계속 걷다 보니 구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군사기지까지 불법으로 들어갔어요.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때는 엄청 무섭고 힘든 순간이었지요.”
-가장 애착이 가는 사진이라면.
“해변가 가운데 배 나온 한 남자가 모자를 쓴 채 혼자 서 있는 사진요. 2007년 스페인에서 찍은 사진인데 당시 여자 친구와 카메라를 들고 바닷가를 거닐다 갑자기 찍게 된 사진이에요. 순간 모래사장이 백지처럼 보이고, 많은 것이 일어날 수 있겠다는 예술적인 촉이 왔다고 할까요? 해변가 시리즈의 시작이기도 해요. 다들 드론으로 촬영한 줄 알지만, 기가 막힌 곳을 발견해 위에서 아래로 찍을 수 있었지요.”
-어떨 때 그런 예술적인 영감이 오나요?
“일단 저는 많이 찍어요. 하루에 3000장 이상 찍은 날도 있어요. 현장에서는 느낌이 좋아 열심히 찍었는데 나중에 보면 별로일 때도 있고, 느낌이 안 살아 대충 찍었는데 집에 와 작업해보니 너무 괜찮을 때도 있거든요. 다양한 곳을 많이 찍다 보면 그곳만의 개성이 보이는 것 같아요. 좋은 빛이 내려오는 순간도 있고요. 스페인 베니돔에서는 특색 있는 대상을 찾을 거라는 예상을 전혀 못 했는데, 한순간 신비로운 빛에 둘러싸인 건물을 하나 발견하게 됐고요. 이후 몇 번 같은 장소에 찾아가봤지만, 그 기분을 느끼진 못했어요. 그 빛은 그 순간에만 내려온 것이지요. 이국적인 곳이나 미지의 공간을 찾아다니기도 해요. 그곳의 ‘플라뇌르(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말한 산책하는 사람)’가 되고 싶다고나 할까요?”
-가본 곳 중 가장 좋은 곳이라면.
“아무리 여행을 많이 해도, 집만 한 곳은 없는 것 같아요. 산 세바스티안에 있는 제 고향 집을 가장 좋아합니다. 외로운 분위기를 가진 동네예요. 아주 근사하고 아름다운 도시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차갑고 고독한 동네입니다. 비도 자주 와요. 그 지역 예술가들은 외로움과 노스탤지어를 자주 다루는데 ‘소니도 산 세바스티안(Sonido San Sebastian)’이라는 음악 장르도 있어요. 우울하고 감성적인 측면을 강조한 음악이지요. 어릴 때부터 그런 음악들을 듣고 자라며 영향을 받았어요.”
-롤모델이 있나요?
“스티븐 쇼어를 가장 좋아해요. 제 돈으로 처음 산 사진집이 그의 ‘American Surfaces’였어요. 일상과 현실을 묘사하는 쇼어에게 매료됐어요. 그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평범해 보이는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재능이 있어요. 제가 닮고 싶은 지점이기도 하죠.”
-사진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사진은 예술 중에서도 아주 드물게 타고난 재능이 필요없는 분야입니다. 요즘은 카메라를 가진 모두가 사진작가라고 생각해요. 기술적으로 서툴더라도 괜찮아요. 그 부족함이 장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중요한 건 정말 사진을 사랑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돈을 생각하지 않고 일해야 돈이 들어오기 때문에 늘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요(웃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밀고 나가며 멈추지 않는 것이 성장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해요. 열정과 인내심, 이 두 가지가 있다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