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한상엽

“이 차가 원래 공장에서 나올 때는 뒷바퀴 각도가 끝까지 다 돌아가도록 제작돼서 나와. 근데 이놈들이 일부러 매달 구독료를 내야만 바퀴 각도가 다 돌아가게 세팅해 놨다니까? 양아치가 따로 없어요!” 배 나온 중년 남자가 차에 오르기 전 잠시 설명했다. 옆에서 듣던 그의 불륜녀, 빨간 원피스의 그녀는 순진한 표정으로 호응해 주었다. “정말요? 원래 되는 걸 안 되도록 막아서 돈을 받는다고요?”

“돈에 미친 거지. 하긴, 나였어도 그렇게 하겠지만. 한번 팔면 끝인 게 아니라 매달 수익이 들어오는데, 안 할 기업이 있겠어? 말하자면 이 구독 서비스가 새로운 시대의 금광인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남자는 여자와 차에 올라탔다. 곧바로 활성화된 차량 인공지능(AI) ‘테미스’가 그를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주인님. 시동 준비 완료됐습니다.”

남자는 계기판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얘가 세계 인공지능 대회에서 1등 한 놈인데, 핸드폰으로 전화 걸어서 커피 사 오라고 하면 혼자 알아서 사 오기까지 한다고.” “진짜요?” “자기도 해보고 싶어? 내가 목소리 등록해 줄까? 마누라 거 삭제하고 자기 목소리 등록하면 되는데.” 둘은 즐겁게 웃었고, 곧 남자가 인공지능에 가까운 바닷가로 가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곧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자, 운전은 얘가 알아서 다 할 거고. 그럼 이제 우린 좋은 시간 보내볼까?”

남자가 차 시트를 뒤로 젖히기 시작하자 깔깔대며 웃던 여자가 계기판을 가리켰다. “괜찮겠어요? 격렬하게 움직이다가 뭐라도 잘못 누르면 어떡해요?” “운전 중 잠금 설정이 돼 있어서 괜찮아. 흐흐, 이 안에서 레슬링을 해도 문제없다고.” “레슬링이요?” “이렇게!” 남자가 달려들었고, 여자는 웃으며 몸을 꼬아댔다. 두 사람이 엉겨 붙는 동안 인공지능은 정숙하게 도로를 주행했다. 곧이어 차 안에 습기가 차고, 테미스가 알아서 환기 시스템을 작동시킨 그때, 갑자기 남자가 여자를 밀어냈다.

“자, 잠깐만…!” 크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 남자가 심장을 쥐어 잡았다. 심각하게 상기된 그의 얼굴은 지금 이 상황이 장난이 아님을 알리고 있었다. “약, 내 약 좀…! 가방에 혈압약!” 발음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남자의 상태에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비명을 지르며 가방을 뒤졌지만, 찾아낸 건 빈 약통뿐. 남자는 입가에 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었다. 비명을 질러대던 여자는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동차 전면을 향해 소리쳤다. “테미스! 병원으로! 테미스!”

“등록된 목소리가 아닙니다.” “병원으로 가자니까! 테미스! 병원으로!” “등록된 목소리가 아닙니다. 멀티 드라이버 서비스를 업그레이드하시면 1명 더 추가할 수 있습니다.” 욕을 내뱉으며 여자가 직접 운전대를 잡아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울면서 한참 허둥지둥하던 여자는, 순간적으로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차량에 목소리가 등록된 남자의 아내에게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인공지능에 대신 명령해 달라고! 곧장 남자의 핸드폰을 들고 주소록의 ‘아내’를 찾아 클릭했다.

“사모님! 큰일 났어요, 사모님!” “응? 누구세요?” 수화기 너머 아내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의아해했고, 흥분한 여자는 요약해 상황을 설명했다. 한동안 여자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내는 얼마 뒤, 분노에 찬 음성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너희가 지금 바람을 피우고 있다 이거지? 나한테는 일한다더니 지금 둘이서 바닷가에 놀러 가는 길이라 이거지?” “사모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아니긴 이 년아!”

수화기 너머로 욕설이 쏟아졌다. 여자는 미칠 것 같았다. 제발 도와달라 울며불며 몇 번이고 통사정한 뒤에야 겨우 아내가 흥분을 멈췄다. “지금 그 양반이 쓰러져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꼴 좋네! 벌 받았네!” “아 제발요! 이러다 진짜 돌아가시면 어떡해요!” “죽으라지! 그딴 새끼는 죽어도 싸!” 엉덩이까지 들썩이며 몸을 격렬히 떨던 여자는 아예 싹싹 빌기 시작했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가 나쁜 년이에요, 예? 다시는 사장님 안 만날게요! 사모님 찾아가서 무릎도 꿇을게요, 가라면 감옥도 갈게요! 아무리 미워도 사람은 살려야 하잖아요!”

그녀의 간절함이 전해졌는지, 수화기 너머 아내가 고민하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테미스한테 병원으로 가자고 명령해 주세요. 예? 그러면 제가 다 할게요. 사모님이 시키는 거 다 할게요. 예?” “으음….” “이러다 진짜 죽어요…. 사람 죽는 거 보는 건 싫다고요. 제발요!” 더는 소리도 못 낼 정도의 목 상태가 된 여자의 귓가에, 드디어 대답이 들려왔다.

“알았으니까 스피커폰이나 빨리 켜!” “감사합니다! 지금 말씀해 주세요! 지금요!” 그녀는 얼른 통화 설정을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뒤 핸드폰을 계기판에 가져다 댔다. 곧이어 아내가 발음을 정확히 끊어 내뱉었다. “테미스!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 테미스!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목소리를 인식한 듯 계기판 불빛이 반짝이는 모습을 여자는 똑똑히 보았다. 이윽고, 인공지능은 빠르게 응답했다. “멀티 드라이버 서비스의 구독료 연체로 기능이 일시 정지되었습니다. 서비스를 다시 사용하시려면 구독료를 납부해 주세요.”

멍하니 할 말을 잃은 여자, 수화기 너머로 계속 명령어를 시도하는 아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인공지능, 그리고 점점 싸늘히 식어가는 남자가 도로 위를 내달렸다. 창밖으로 흐릿하게 바다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