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걸까. 지난 12일 이른 아침 웬 남성이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123층) 외벽을 맨손으로 올랐다. 밧줄도, 헬멧도 없었다. 새벽 5시에 등반을 시작한 그는 9시쯤 73층에서 구조’당했다’. 두 손에 하얀 초크(미끄럼 방지용 탄산마그네슘)를 묻힌 채 경찰에 연행된 이 사람은 스물셋의 영국인 조지 킹 톰프슨. 고층 빌딩 등반가다.
험준한 암벽이 아닌 매끈한 통유리창에 매달린다. 철골 기둥을 붙잡고 창틀을 딛는다. 마천루 외벽에 흰 초크 자국을 바늘땀처럼 새기며 기어오른다. 이 위험천만한 기행(奇行)의 이름은 ‘빌더링(Buildering)’. 빌딩(Building)과 볼더링(Bouldering·맨손 암벽 타기)을 합친 말이다. 등산 장비 없이 지형지물만을 이용해 맨몸으로 암벽을 오르는 ‘자유 등반’의 도시 버전이라 할 수 있다.
톰프슨은 건조물 침입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너무 위험해서 어느 나라에서도 공인하지 않는 극한의 스포츠. 체포하고, 구금하고, 끌어내리는데도 전 세계 초고층 빌딩을 맨손으로 오르는 이들은 계속 생겨나고 있다.
◇도심에 나타난 거미 인간들
저마다 메시지를 갖고 오른다. 톰프슨은 2021년 런던 스트래토스피어 타워(36층)를 맨손으로 등정한 뒤에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올랐다”며 “정치 지도자들이 빨리 과감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현역 최고 빌딩 등반가인 프랑스의 알랭 로베르(61)는 2008년 뉴욕 타임스 빌딩(59층)을 맨몸으로 오르면서 “지구온난화는 매주 9·11(테러) 이상으로 사람들을 죽인다”고 쓴 현수막을 내걸었다. 2018년 무단으로 롯데월드타워를 올랐다가 붙잡혔을 때는 “남북한의 평화에 급속한 진전이 이뤄지고 있어 기념하기 위해 올랐다”고 말했다. 2015년에는 네팔 대지진 희생자를 추모하며 파리 몽파르나스 타워(59층)를 등정했다. 지난달 스페인 멜리아 바르셀로나 스카이 호텔(31층)을 오르면서는 “기후변화와 스페인의 가뭄 문제를 알리고 싶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사진 작가 머스탱 원티드(36·본명 파블로 우시비츠)는 첨탑에 올라 아슬아슬한 사진을 찍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4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코텔니체스카야 제방 빌딩(32층)에 올라 소련을 상징하는 황금색 별 위쪽을 푸른 페인트로 칠해 우크라이나 국기처럼 만들고 ‘셀카’를 찍었다. 당시 러시아에 억류돼 있던 우크라이나 여성 조종사 나디야 사우첸코를 석방하라는 의미였다.
작년에는 미국 대학생 메종 데샹(23)이 샌프란시스코의 세일즈포스 타워(61층)를 안전 장비 없이 올라 화제가 됐다. 자칭 ‘낙태를 반대하는 스파이더맨(pro-life Spider Man)’인 그는 “낙태 반대 단체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고 등반했다”고 말했다. 그 전에는 네바다주의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 항의하는 뜻으로 라스베이거스 아리아 카지노(61층) 외벽을 올라 촬영한 동영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기도 했다.
◇진정한 도전자인가, 지독한 ‘관심 종자’인가
거미 인간들의 아슬아슬한 곡예는 확실히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2003년 로베르가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국립은행을 맨몸 등반한 현장에는 10만 관중이 운집했다. 마천루 사진 작가 비탈리 라스칼로프와 바딤 마호로프의 유튜브 채널 ‘온 더 루프스(지붕 위에서)’는 구독자가 128만명이다. 2014년 건설 공사 중이던 상하이 타워(128층)의 철골 구조물을 등정하는 영상은 현재까지 조회수 9498만을 기록하고 있다.
목숨을 건 무모한 도전으로 보는 떫은 시선도 있다. 영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더 샤드 전망대(72층) 등을 무허가로 오른 애덤 록우드(22)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한 판사는 “명성을 향한 탐욕과 오만함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록우드는 아랑곳 않고 “(등반을) 멈출 수 없고, 멈추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의미로 몽파르나스타워를 52분 만에 주파한 알렉시스 랜도(23)는 “위험을 내 능력으로만 극복하기 때문에 삶을 100% 통제하는 느낌이 든다. 그 순간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했다.
기후 위기나 전쟁 반대는 ‘후첨’하는 핑계에 가깝다. 영국의 전설적인 산악인 조지 맬러리는 ‘왜 에베레스트를 오르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 도심의 초고층 빌딩을 정복하려는 거미 인간들의 심리도 비슷하다. 마천루가 거기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