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붉은 군대'의 선전 포스터. 태극기를 든 소련군의 모습이 흥미롭다. 북한에서 인공기가 사용된 것은 1947년 이후였다. 접혀서 훼손된 부분은 복원했다. /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이휘성) 제공

함경북도 회령 출신 소설가 최인훈은 열 살 때 겪은 소련군의 진주(進駐)를 훗날 이렇게 기억했다. “소련군은 국경 지역 일본군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들어왔다. 만주와 소련에 이웃한 함경북도의 북쪽 지역은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전쟁마당이 되었다. 두만강가에 있는 군사기지였던 H읍도 전쟁의 불길을 겪었다. 민간인 거주지에는 피해가 없었고 주로 목표가 된 것은 군사시설이었는데, 시가지의 동북쪽에 있는 병영, 비행장, 철도가 폭격당했고 역사(驛舍)는 그때 불탔다.”(‘화두’)

소련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인 것은 다름 아닌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였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태평양전쟁의 전황은 완연히 미국의 승리로 기울었지만, ‘1억 옥쇄’를 각오한 일본의 항전 의지는 결연했다. 미국은 소련군의 참전 없이는 빨라도 ‘1946년 연말’에야 전쟁이 끝나리라 예상했다. 2월 얄타에서 스탈린과 만난 루스벨트와 처칠은 대일전에 소련의 참전을 요청했다. “외몽골의 위성국 존속” “다롄항, 뤼순항 조차권 회복” “만주철도의 중국과 공동 운영” “쿠릴열도의 소련 할양” 등등. 스탈린은 도무지 “염치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요구 사항을 늘어놓았다. 아쉬운 처지였던 루스벨트와 처칠은 이를 대부분 수용했다.

“독일이 항복한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소련은 일본과 전쟁에 들어간다.” 얄타에서의 비밀 합의에 따라 4월 소련은 일본에 소·일 중립조약의 폐기를 통보했다. 그러곤 비밀리에 극동으로 인력, 장비, 물자를 운송했다. 불과 넉 달 만에 30개 사단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이 극동의 새로운 주둔지로 이동했다. 이를 위해 13만6000량의 열차가 동원되었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매일같이 22~30편씩 투입돼 장장 1만㎞를 내달렸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사흘 후인 9일 0시를 기해 소련군은 만주의 서부, 동부, 북부 세 방면에서 관동군을 상대로 일제히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그날은 얄타에서 스탈린이 약속했던 “독일이 항복한 지 정확히 3개월이 지난 날”이기도 했다. 한때 일본 육군 최정예로 꼽히던 100만 병력의 관동군은 핵심 전력이 중국과 남방 전선으로 차출돼, 70만 명 규모로 축소된 상태였다. 158만 명 소련 극동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소련군은 ‘8월의 폭풍’처럼 속도전으로 관동군을 몰아붙였다. 불과 2주 만에 작전 길이 5000㎞, 반경 600~800㎞의 긴 전선, 국경지대에 산재한 17개 요새, 4500개에 달하는 영구 장애물을 돌파했다. 일본군 8만3000여 명이 전사했고, 무려 64만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렇듯 세계 전사(戰史)에서 유례없는 대승은 패잔병을 상대로 한 ‘빈집털이’는 아니었다. 미국의 군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일본군 지휘관은 무능했지만, 병사들은 용감하고 자기희생적인 사무라이로서 명성에 걸맞게 행동했으며, 형편없는 지휘를 받으면서도 소련군에게 3만2000명의 인명 피해를 입혔다”고 평가했다.

동만주 주요 도시 점령 임무를 띤 제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의 작전 지역에는 한반도 북동부 해안 지역이 포함되었다. 9일 개전과 동시에 관동군의 보급선(補給線)과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소련 태평양함대 소속 항공대가 일본군 해군기지가 있는 나진, 웅기, 청진 지역에 대대적인 공습을 단행했다. 10일 이틀째 폭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제25군 선발대가 경흥을 점령했다. ‘해방’을 ‘일본의 지배력 상실’로 정의한다면, 경흥은 일왕의 항복 선언 닷새 전 이미 해방을 맞았다. 11일 태평양함대 소속 해병대가 웅기항에 상륙했고, 이튿날 육군 제25군과 합동 작전으로 웅기를 장악했다. 13일 나진을 점령한 소련군은 곧장 청진으로 진격했다.

파죽지세로 몰아치던 소련군은 청진에서 처음으로 일본군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15일 일왕의 항복 선언 이후에도 청진의 4000여 일본군 수비대는 항전을 멈추지 않았다. 제25군은 태평양함대의 함포 사격과 항공대의 폭격 지원 아래 16일 오후에야 가까스로 청진을 점령했다.

소련군은 나남, 부령, 어대진, 원산을 차례로 점령했다. 산발적인 전투는 20일까지 이어졌다. 열흘 남짓한 한반도 전투에서 소련 육·해군은 1963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고, 그중 전사자는 691명이었다. 한국전쟁 3년 동안 소련군 전사자 299명의 2배가 넘었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입성한 소련 제25군을 평양 시민들이 대동교 앞에서 소련기와 ‘환영 소련 련합국'이라 쓴 현수막을 들고 환영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해방’된 도시 곳곳에 태극기와 소련기가 내걸렸고, 소련군을 ‘환영’하는 집회가 이어졌다. 나진의 주민 대표는 해병 부대를 찾아와 자원봉사를 제안했다. 청진 주민들은 소련군 부상병을 집으로 데려가 돌봐주었고, 갈증으로 기진맥진한 전차병들에게 냉수를 날라주었다. 조선인처럼 옷을 바꿔 입은 일본 군인들을 가려내 주기도 했다.

이후 평양 모란봉에는 30m 높이의 ‘해방탑’이 세워졌다. “위대한 쏘련 인민은 일본제국주의를 쳐부수고 조선 인민을 해방하였다. 조선 해방을 위하여 흘린 피로 조선 인민과 쏘련 인민의 친선은 더욱 굳게 맺어졌나니 여기에 탑을 세워 전체 인민의 감사를 표하노라. 1945년 8월 15일”

하지만 소련군은 ‘해방군’으로서 선량한 모습만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소련군은 유럽의 점령지 곳곳에서 약탈과 성폭행으로 물의를 일으키곤 했다. 동베를린에서는 2주 동안 9만여 명의 독일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다. 만주와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부 소련 병사는 조선 사람을 보면, “다와이(달라)”라고 소리치며 무엇이든 빼앗으려 들었다. 평양 거리에는 팔에 시계를 네댓 개씩 차고 다니는 소련 병사도 있었다.

소련군은 처음에는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 부녀자를 성폭행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인 부녀자도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다. 함경남도 흥원군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윤호근은 훗날 이렇게 기억했다. “소련병을 태운 열차가 나타나면 마을 전체가 죽음의 거리로 변했다. 시베리아에서 남하하는 소련 병사들이 강간이나 약탈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대문을 잠그고 집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연합국 가운데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조선을 해방시킨 유일한 군대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전사한 소련 청년 691명 중 상당수는 일왕의 항복 선언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말 그대로 다 끝난 전쟁에서 아까운 목숨만 잃은 셈이었다. 소련은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들에게 자유와 독립을 가져왔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들에게 자유와 독립이 찾아오기 전 서둘러 전쟁에 개입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웠다.

평양 모란봉에 있는 해방탑. 1946년 해방 1주년을 기념해 축조됐다. /전봉관 교수 제공

<참고 문헌>

최인훈, ‘화두’, 문학과지성사, 2008

가브릴 코로트코프,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2

기광서, ‘8·15 해방에서의 소련군 참전 요인과 북한의 인식’, 북한학연구학회보 제9-1호, 2005

김학준, ‘북한의 역사’, 서울대출판부, 2008

데이비드 글랜츠, ‘8월의 폭풍’, 길찾기, 2018

바실리예프스키 외, ‘레닌그라드로부터 평양까지’, 함성, 1989

박병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선인, 2010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 ‘1945년 남한에서’, 한울, 1996

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이휘성), ‘김일성 이전의 북한’, 한울,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