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핸드폰을 압수했다고 했을 때 아수라장이 될 줄 알았지.”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은 당을 발칵 뒤집어 놓은 ‘돈 봉투 사건’을 작년 말 이미 예상했다고 했다. 검찰이 그동안 꽁꽁 숨겨져 있던 핸드폰을 발견했다는 소문이 돌자, 전전긍긍하는 정치인이 한둘이 아니었다고도 전했다. 그렇게 민주당 돈 봉투 사건은 송영길 전 대표 최측근인 이정근씨의 핸드폰에서 시작됐다.
핸드폰은 ‘판도라의 상자’다. 하루 24시간 나와 함께하고, 10대부터 죽을 때까지 생(生)의 기록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몇 시에 눈을 뜨고 잠에 드는지, 누구와 통화하고 만나는지, 어디서 뭘 먹고 얼마를 썼는지,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영상을 보는지, 뭘 궁금해하고 어떤 단어를 검색하는지, 모든 것을 저장한다. 아빠, 엄마, 남편, 아내보다 가까운 존재. 그래서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것을 여는 순간 고통과 재앙이 시작된다.
돈 봉투 사건, 핸드폰이 발단
검찰은 이정근씨가 수년간 써온 핸드폰을 총 4대 압수했다. 통화 녹취록만 3만개가 넘었다. 이씨는 돈 봉투 사건과는 다른 개인 비리 건으로 작년 9월 구속됐다. 한 사업가에게 9억원을 수수한 혐의다. 수사 과정에서 이씨는 “폭우 속에서 휴대전화를 잃어버려 새로 개통했다”며 사실상 ‘깡통폰’만 제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검찰이 뒤늦게 이씨 어머니 집 등에서 이씨 핸드폰을 확보하면서 사건은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이씨는 2021년 민주당 당대표 선거 때 송영길 전 대표를 도우면서 야당 정치인들과 합세해 돈 봉투를 뿌렸다. 이 사실은 고스란히 핸드폰 속 통화 녹음 파일에 남아 있었다. 당시 이씨와 민주당 의원들은 서로 통화하면서 “거기는 해야 해” “세 개 뺏겼어” “내일 돈 주면 안 되나” 등 실명을 언급하며 노골적인 돈 얘기를 했다. 검찰은 돈 봉투 사건에 최소 20명의 야당 정치인이 연루돼 있다고 본다. 이씨는 국회의원 등에게 반말을 하며 “오빠” “언니”란 호칭을 썼고, 나이가 어리면 “자기가~” “아우가~”라고 불렀다. 이씨의 핸드폰이 검찰 손에 들어가면서 이씨의 ‘오빠(윤관석, 이성만)’들은 탈당했고 검찰 조사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이씨의 은밀한 사생활도 공개됐다. 이씨는 평소 ‘오빠’라고 불렀던 사업가에게 삼성동 백화점 L 명품 매장에서 봐둔 물건이 있다며 사달라고도 한다. 가방과 신발 등이다. 사업가가 혼자 매장에 방문해 결제를 하면 이씨가 찾아가고 “고맙다” “또 사달라”고 하는 내용의 통화 기록, 메시지도 남아있었다. 이씨 핸드폰 때문에 민주당은 쑥대밭이 됐고, 아직 공개 안 된 ‘이씨의 오빠’들은 지금도 떨고 있다.
핸드폰의 위력은 그만큼 대단하다. 그래서 송영길 전 대표는 돈 봉투 사건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귀국하기 직전, 현지에 휴대전화를 버렸다. 검찰이 아예 찾지 못하게. 그런 뒤 검찰에는 새로 개통해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공(空)폰’을 제출했다. 그런데도 송 전 대표는 “떳떳하다”며 서울 중앙지검에 자진 출석하는 기괴함을 보였다. 정치권 관계자는 “송 전 대표가 굉장히 똑똑한 것이다. 핸드폰을 완벽하게 숨겼으니 자신감이 넘치지 않았겠냐”며 “대선을 진두지휘한 송 전 대표 핸드폰이 털린다고 생각해 봐라. 상상하기도 싫다”고 했다.
李 측근도 수사 중 “핸드폰은 버려라”
이재명 대표는 핸드폰 관리에 철저하다. 본인뿐 아니라 아내, 자녀 등 여러 차례 압수 수색을 당해봤기 때문에 민감한 것들은 남기지 않으려고 텔레그램을 사용한다고. 구속됐던 이 대표 측근들도 마찬가지다. 2대 이상의 핸드폰을 번갈아 사용했다. 이 대표의 ‘오른팔’로 불리는 정진상씨는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으로 수사받던 지인 유동규씨에게 “전화를 창밖으로 던지라”며 증거인멸을 지시했다. 유씨가 핸드폰을 검찰에 뺏길 때 파장을 걱정한 것이다. 또 다른 측근 김용씨는 평소 핸드폰을 2대 써왔는데, 체포 직전 하나는 잃어버렸다고 했고 다른 하나는 비밀번호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이 대표는 성남시장, 경기지사, 대선 후보까지 했다”며 “핸드폰에 얼마나 민감한 것이 많겠냐”고 했다.
그러나 핸드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 대표는 지난 대선 때 극단 선택을 한 김문기 성남도시개발공사 개발1처장을 “몰랐다”고 했지만, 숨진 김씨 핸드폰에서는 발신인 ‘이재명’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가 다수 발견됐다. 김씨는 이 대표 생일도 저장해 놨을 정도로 이 대표를 가깝게 느꼈다. 이 대표는 이 사건과 관련한 허위 사실 공표 혐의로 곧 재판을 받는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2012년 대선 패배 워크숍에서 초선 국회의원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했다. “핸드폰은 하나만 쓰세요. 2대, 3대 쓰는 정치인들도 있는데 그러면 교도소 담벼락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래된 경험에서 하는 말입니다.” 박 전 원장의 당시 강연은 민주당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핸드폰 속의 ‘나 자신’이 공개돼도 괜찮을 정도로 깨끗하게 정치하라는 충고였다.
야권에선 최근 ‘60억’ 코인(가상 자산) 의혹으로 민주당을 탈당한 김남국 의원 사건도 검찰의 핸드폰 확보에 달렸다는 말이 나온다. 김 의원은 작년 한동훈 법무 장관 인사청문회 등 국회 회의 시간에도 휴대전화로 코인을 거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 의원은 “쉬는 시간에 휴게실, 화장실에서 거래했다”고 해명했는데, 핵심 의혹은 그가 미공개 정보로 돈을 벌었느냐다. 업계에서도 어떤 귀띔이 없었다면 이런 과감한 투자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그 의혹을 풀어줄 단서는 김 의원 핸드폰. 김 의원이 뭘 했는지는 그의 핸드폰이 다 알고 있다.
핸드폰 속 은밀한 사생활
정치인들은 의도치 않은 핸드폰 공개로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알려지면 안 되는 공적인 일도, 민망한 개인사도 있었다. 2015년 정의당 박원석 의원은 ‘조건 만남’을 검색, 얼마 안 있어 국회 본회의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언론사 카메라에 찍혔다. 박 의원은 “자동 완성 기능이었다”고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한 의원은 불륜 의심 문자메시지를 들키기도 했고, 어떤 의원은 누드 사진을 보다 걸렸다. 작년엔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대행이 윤석열 대통령과 주고받은 사적 텔레그램이 카메라에 포착돼, 권 대행이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그만큼 국회 본회의장, 상임위 등에서 핸드폰 사고는 자주 일어난다. 무심코 연 핸드폰 때문에 ‘비밀’이 탄로난다. 지난 4월 재선거로 국회에 입성한 진보당(옛 통진당) 강성희 의원도 금배지를 달고 주변에서 “핸드폰을 조심하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한다. 핸드폰을 꼭 지키고 싶은 건 정치인뿐은 아니다. 최근 마약 투약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유아인씨도 압수 수색 과정에서 휴대전화만은 사수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2대를 압수당했다. 경찰은 포렌식을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사진 등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공개하고 싶지 않은 사생활이 있지 않았겠냐”고 했다.
정치인은 타인의 핸드폰도 조심해야 한다. 사진, 동영상을 남길 수 있는 카메라가 장착돼 있고 숨소리 하나도 다 기록할 수 있는 녹음 기능까지 있기 때문이다. 최근 ‘대통령실 공천 개입 의혹 녹취록’ 파문으로 최고위원을 사퇴한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을 궁지로 몬 것도 보좌진의 핸드폰이었다. 보좌진 중 누군가가 이 녹음 파일을 언론사에 넘기면서 파장은 걷잡을 수 없게 커졌다. 민주당 한 의원은 “그래서 안 친한 사람을 만날 때 녹음을 하곤 한다”고 했다. 이 의원은 기자와 대화를 할 때도 핸드폰 녹음기의 빨간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