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연예인의 회고담을 전하는 방송에서 우연히 야간 통행금지(이하 통금)에 얽힌 일화를 들었다. 초대 손님은 심야 음악 프로 진행자였는데 일을 마치면 통금 때문에 허가받은 방송국 차를 얻어 타고 집에 가곤 했다는 내용이었다.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유사한 경험이 있던 터라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았다.
예전 우리나라에 통금 제도가 있었다. 자정이면 매일같이 사방으로 사이렌이 울리면서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통금은 새벽 4시에 또 한 차례 사이렌 소리와 함께 풀렸다. 따져 보면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반인권적 규제였는데 당시는 그런 의식이 없었는지 모두가 군말 없이 따랐다. 아니, 정부 지시에 대한 의문은 금물이고 무조건 복종만이 미덕이었다. 지금 같은 민주화 시대가 아닐뿐더러 실제로 치안이 불안했고, 북한에서 침투하는 무장 간첩에게 촉각을 곤두세우는 암울한 시절이기도 했다.
이유 없이 쏘다니다 경찰에게 발각되면 중죄인처럼 끌려갔다. 심문 후 중대 혐의가 없는 단순 위반자로 밝혀지면 구류나 벌금 처분을 받았다.
어려서는 어차피 오밤중에 돌아다닐 까닭이 없어 통금에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는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친구들과 기분 좋게 술 한잔 하는 중에 밤 11시가 넘어가면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노래가 흘러나오면서 어두컴컴하던 술집이 환해졌다. 마음이 슬슬 급해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 막차를 놓치면 낭패를 보기 때문이다. 파출소로 잡혀가는 수모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밥은 나가 먹어도 잠은 반드시 집에서 자야 한다는 부모님 말씀을 어기는 날엔 눈물이 쏙 빠질 만큼의 꾸지람을 감수해야 했다.
매년 크리스마스이브와 양력 섣달그믐날 또는 대통령 취임식 날에는 통금이 없었다. 국민에게 선심 쓰듯 잠시 숨 쉴 공간을 준 것이다. 젊은이들은 신명이 나서 명동 거리며 종로 거리로 구름처럼 몰려나갔다. 통금 시간에 거리를 다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들뜬 마음으로 성탄절 기분을 내고, 새해를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도 들었다. 추운 날씨에 인파를 헤치며 무턱대고 명동 거리를 왔다 갔다 했는데 돌이켜보면 참으로 우스운 짓거리가 아닌가.
인턴 시절 충북 청주의 도립의료원(현 청주의료원)에서 석 달 동안 파견 근무를 했다. 한결 여유롭고 무엇보다 교수님과 선배님의 층층시하를 벗어나서 좋았다. 금상첨화 격으로 충청북도에는 통금이 없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유일하게 내륙인 충청북도와 멀리 바다 건너 제주도는 비교적 안전하다는 판단인 듯했다. 당직이 아닌 날 밤은 동료와 어울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젊음을 즐겼다. 덕분에 쥐꼬리만 한 월급을 술값으로 탕진하곤 했지만 시간 제약 없이 자유를 만끽했다.
눈코 뜰 새 없던 레지던트 때다. 교수님이 모두 퇴근하신 후 아주 급한 일을 대강 마무리하고 병원에서 멀지 않은 음식점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발동이 걸렸는지 질펀하게 술판이 벌어졌는데 한껏 기분을 내다보니 12시까지 10여 분밖에 남지 않았다.
수술 준비 등 밀린 일이 태산인데 어쩌지. 궁리 끝에 병원까지 후닥닥 뛰어가기로 작당했다. 서너명이 냅다 달리는데, 경찰이 몽둥이를 치켜들고 호루라기를 불며 따라붙을 것 같았다. 뒤도 안 돌아보고 걸음아 날 살려라, 신작로를 가로질러 가까스로 통금 시작과 동시에 병원 정문을 통과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아무튼 술이 확 깨고 말았다.
수석 전공의 시절에는 퇴근 후에도 이런저런 환자 상태에 대하여 전화로 당직 전공의의 자문에 응했다. 구두 지시로 해결되면 다행이지만 수술이 필요한 경우 등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할 때가 문제였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두고 통금 해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병원 구급차를 불렀다. 허가받은 구급차는 통금 중에도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체계적인 구급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응급 수술이 빈번한 진료과 레지던트는 툭하면 병원의 구급차 기사에게 개인적으로 어려운 부탁을 해야 했다.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서 잡아탄 구급차가 순식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일반 가정에서 통금 중에 갑자기 급한 환자가 생기면 어떻게 병원에 갈까? 텅 빈 거리를 달릴 때면 발을 동동 구르며 애간장이 탔을 환자 가족의 모습이 안 봐도 비디오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외과 의사와 횟집 주방장은 칼질로 입에 풀칠한다는 점이 같다. 척추 전문 의사와 조폭은 남의 등을 쳐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는 우스개도 잘 알려진 ‘아재 개그’다. 하지만 신경외과 의사와 심야 방송 진행자가 특수차를 타고 다니며 밤일을 했다는 공통점은 새로운 발견이 아닐까.
수많은 에피소드와 사연을 남긴 통금은 1982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친 국민을 달랠 필요가 있었고, 무엇보다 사회가 성숙했기 때문이다. 통금이 없어진다니 꿈만 같았다. 처음에는 모두가 환호성을 올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당연하듯 감흥이 사라졌다. 이제는 언제 그런 제도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전쟁이나 정변이 일어난 외국에서 통금을 시행한다는 뉴스를 가끔 듣는다. 코로나 감염 때문에 도시 전체를 봉쇄한다는 다른 나라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자유를 구속받기 싫었던 얼룩말 세로처럼 좌충우돌했던 내 젊은 날들이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