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화 거장 청전 이상범(1897~1972)의 1959년 작 ‘산가춘색’. 안빈낙도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갤러리현대

자공이 말했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럭저럭 괜찮지. 그런데 가난해도 즐거움을 잃지 않고, 부유해도 예를 좋아하는 경우만은 못하다.” 자공이 말했다. “‘시’에서 ‘끊어내듯이, 잘라내듯이, 쪼듯이, 갈듯이’라고 한 말은 아마 이것을 이르는 거겠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賜)야. 비로소 더불어 시를 논할 만하구나. 한마디 말해주니, 다음에 올 것을 아는구나(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사람들은 대개 돈을 ‘아주 많이’ 벌고 싶어 한다. 왜? 넘치는 돈이 없으면 불안하니까. 그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돈을 번다. 사회보장제도가 부실한 곳에서는, 사회안전망이 불충분한 곳에서는, 가족이 기댈 곳이 되지 못하는 곳에서는, 그나마 돈이 믿을 만하다. 누구나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럴 때 의지할 곳은 돈이다. 돈은 불안으로부터 자유를 사는 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한다.

어떤 이들은 고된 노동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돈을 번다. 돈을 많이 벌면, 그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고, 그 시간만큼은 하기 싫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롭다. 그 시간에 널브러져 한껏 쉴 수 있을 뿐 아니라, 돈이 아주 많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를 얻을 수도 있다. 작은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싶어도 적지 않은 돈이 든다. 마음에 드는 공간을 임대해서 취향대로 인테리어를 하고 싶어도, 언젠가 건물주 사정으로 이사 가야 할지 모른다. 그게 자기 건물이면 그럴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벌어 놓은 돈이 많으면, 서슴없이 장기적 관점에서 인테리어를 할 자유가 생긴다.

다른 자유도 있다. 일본 와카야마현의 76세 남성 노자키 고스케의 경우를 보자. 지난 3월 6일 방송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노자키의 꿈은 큰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었다. 수중에 7억엔의 현금을 가지고 있을 정도의 큰 부자가 된 것이다. 왜 그는 그토록 돈을 많이 벌었나? 노자키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여자와 동침하기 위해 부자가 됐다. 지금까지 4000명의 여성에게 300억원을 썼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다.” 그러던 그는 55세 연하인 21세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 젊은 부인은 돈을 노리고 늙은 노자키를 살해했다. 성욕의 자유(?)를 추구했던 어떤 남자의 불꽃 같은 생애는 이렇게 끝났다.

또 다른 자유도 있다. 공자 제자 자공(子貢)은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에 등장할 정도로 큰돈을 모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돈만 많은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라, 부자이면서도 상당한 덕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어느 날 자공은 칭찬을 기대하며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이 질문에는 자신이 돈이 많기는 해도 부덕한 졸부는 아니라는 자부심이 묻어 있다.

그렇다. 가난하면서 아첨하지 않기가 어디 쉬운가. 가난에 시달리면 자기 자신을 지켜내기 어렵다. 비굴하게 아첨을 해서라도 이 지독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유혹이 들 수 있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자긍심을 지니는 이는 대단하다. 자공이 한때 가난하면서도 비굴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기도 쉽지 않다. 돈이 많으면 많은 일을 자기 뜻대로 척척 할 수 있다. 그뿐인가. 사람들이 환심을 사려고 자신에게 아첨할 것이다.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교만해지지 않는 이는 많지 않다. 자공이 부자가 되어서도 교만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선생님의 칭찬을 기대할 만도 하다.

그러나 공자의 대답은 자공의 기대를 벗어났다. “그럭저럭 괜찮지.” 나쁘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나은 단계가 있기에 크게 칭찬할 만한 상태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보다 더 나은 단계란? “가난해도 즐거움을 잃지 않고, 부유해도 예를 좋아하는” 상태다. 이 상태는 정말 대단하다. 가난하면서 비굴하지 않기도 어려운데, 심지어 즐거워할 수 있다니!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도 어려운데, 심지어 예의 바르기까지 하다니!

이 최고 단계의 핵심은 무엇일까. 송나라 때 주석가 주희(朱熹)는 이렇게 말했다. “아첨하지도 않고 교만하지도 않다면, 자아를 지킬 줄 아는 거다. 하지만 아직 빈부를 초월하지는 못한 거다(無諂無驕, 則知自守矣, 而未能超乎貧富之外也).”

그렇다. 빈부는 하나의 도전이다. 자신의 자아를 침식하려 드는 심각한 도전이다. 그 도전에 패배하면 인간은 저열해진다. 가난하다고 비굴한 사람이나, 부유하다고 교만한 사람이나 모두 빈부에 의해 자아가 침식된 이들이다. 지나치게 가난하거나 부유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자아가 녹슬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아를 지켜야(自守) 한다. 주희는 자아보다 집단을 중시한 일종의 집단주의 사상가였다는 견해가 세간에 팽배하지만, 주희의 글에는 이처럼 자아를 중시한 흔적도 많다. 바로 그 점에 주목하여 전통 중국의 자유주의 전통을 재구성한 학자마저 있을 정도다.

주희는 빈부에 침식되지 않고 자아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아를 지키는 것 이상의 자유가 존재함을 상기시킨다. 빈부에 함몰되지 않으려고 낑낑대는 단계는 아직 빈부를 초월한 상태는 아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외치는 상태는 나름 멋지기는 하지만, 아직 빈부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단계다. 그렇다면 빈부를 진정 초월한 단계는 대체 어떤 상태일까. “즐기면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넉넉해지며, 가난을 잊게 된다(樂則心廣體胖, 而忘其貧).” 이 단계에 이른 사람의 표정과 몸가짐에는 긴장이 사라지고 편안함이 깃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