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라페 샌드위치. /블로거 '써미'

지난 2월 문을 연 서울 종로구 광화문의 한 레스토랑에선 ‘당근’이 주연을 맡는다. 샌드위치부터 샐러드, 케이크까지 얇게 채 썬 당근이 듬뿍 올라간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한 식당은 ‘당근 파스타’를 내놓는다. 채 친 당근을 부친 ‘당근전’은 스위스식 감자 팬케이크 이름을 따 ‘당근 뢰스티(RÖSTI)’란 이름까지 얻었다.

이제껏 당근은 음식의 주인공인 적이 없었다. 야채 안 먹는 아이 몰래 볶음밥에 다져 넣거나 김밥, 잡채, 카레에만 겨우 들어갈 뿐. 오이가 소박이로, 가지가 라자냐로, 감자가 ‘사라다’로, 곤드레마저 솥밥으로 인기 있을 때에도, 당근에겐 기회가 없었다. 그 사이 수입 과일 ‘아보카도’가 MZ세대의 브런치(서구식 아침 메뉴와 점심 메뉴가 혼합된 식사) 대표 메뉴로 자리 잡고, 고혈압에 인기 있다며 낯선 ‘비트’마저 절임으로 사랑받을 때도 당근만은 요지부동. 그랬던 당근에게 마침내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있다.

◇쉽고, 저렴하고, 건강하다

취업 준비생 한경민(27)씨는 한 달에 한 번 이상 ‘당근 라페’를 만든다. 라페(râpées)는 프랑스어로 ‘채를 썰다’란 의미. 당근을 잘게 채 썰어 올리브 오일과 소금, 식초 등에 절인 프랑스식 피클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이렇게 만든 당근 라페는 샌드위치 속 재료로, 샐러드 토핑으로, 느끼한 음식과 함께 먹는 입가심 반찬으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당근 라페 샌드위치. /블로거 '또갱'

당근을 브런치 주인공으로 만든 일등 공신도 바로 이 ‘당근 라페’다. MZ들이 많이 이용하는 소셜미디어 인스타그램에서 ‘당근 라페’를 검색하면 5만개 이상 게시물이 나온다. 한씨는 “너무 더운 여름날, 절대로 불 쓰는 요리는 하기 싫은 날, 상큼달콤하게 먹을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하다 냉장고 속 당근으로 라페를 만들기 시작했다”며 “익힌 당근은 식감이 뭉개지고 생당근은 풋내가 강하며 지나치게 딱딱한 데 반해, 당근 라페는 당근의 달큼한 맛을 그대로 살리면서 식감도 좋다. 당근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고 했다. 만들기 쉬우면서도, 가격은 저렴하고, 열량은 높지 않단 점이 MZ세대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당근의 선명한 색감과, 채 썰었을 때의 풍성함은 소위 말하는 ‘인스타그래머블(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한 요소이기도 하다.

당근 뢰스티. /블로거 '미니토리'

주부 고연미(37)씨는 당근 뢰스티를 만들고 나서 당근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고 했다. “당근은 다른 야채보다 주재료로 사용하긴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얇게 채를 썰어 익히니 바삭하고 달큼해 고구마 같은 맛이 나면서도 이국적인 향과 맛까지 있어, 간단하면서도 너무 맛있는 일품 요리가 되더라.”

◇아보카도와 당근의 세대교체?

당근이 브런치 왕좌를 새롭게 노리는 사이, 몇 년 전 수퍼푸드로 주목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아보카도는 주춤한 모양새다. 아보카도는 멕시코 등 남미가 주산지인 수입 과일이다. 크림을 떠먹는 듯한 부드러운 질감과 맛 덕분에 샌드위치, 샐러드 등 양식은 물론 ‘아보카도 명란 밥’ ‘아보카도 김밥’ 등 퓨전 한식에도 즐겨 사용됐다. 그러나 멕시코 농부들이 아보카도를 심기 위해 파괴한 숲이 매년 여의도 면적의 2배가 넘는 데다, 아보카도 1㎏을 수확하려면 2000리터가 넘는 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환경 파괴 주범’이란 오명과 함께 MZ의 신임을 잃었다.

매년 ‘대한민국을 이끄는 외식 트렌드’를 펴내는 식문화 콘텐츠 기업 다이어리알 이윤화 대표는 “코로나를 거치면서 건강한 식재료와 로컬 푸드(장거리 운송을 거치지 않는 지역 농산물), 지속 가능한 생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당근을 주연으로 불러냈다”고 했다. “요즘엔 식재료를 표기할 때 단순히 ‘국내산’ ‘외국산’이 아니라 ‘어느 농부가 생산했다’까지 쓰기도 한다. 당근의 경우에도 제주 구좌 당근 자체가 소비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원재료의 중요성을 알게 되다 보니, 당근 라페나 뢰스티 등 재료 본연의 맛을 충분히 느끼는 요리법에 대한 선호도 강해졌다.”

당근 라페가 들어간 샐러드. /SPC삼립

당근이 주연으로 활약하자 기업들도 앞다퉈 당근을 활용한 제품을 내놓고 있다. GS 편의점과 세븐일레븐에선 각각 ‘벅스 버니 당근 라페 샌드위치’ ‘제주 구좌 당근 라페 샌드위치’를 내놓았다. 스타벅스는 제주 지역에 한해 판매하던 ‘제주 당근 산도롱 샌드위치’를 전국 7개 매장에서도 선보인다. SPC삼립이 운영하는 샐러드 전문점 ‘피그 인 더 가든’에선 지난 2월 당근 라페를 넣은 샐러드 2종을 새로 출시했다.

SPC 관계자는 “당근 라페는 영양 측면에서도 우수하고, 색감 역시 눈길을 사로잡아 출시 이후 꾸준히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며 “출시 한 달 만에 당근 라페가 들어간 샐러드 두 종류 모두 전월 동기 대비 판매율이 각각 27%, 33% 증가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