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학교 폭력에 대한 사적 복수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파트2가 지난 10일 공개되자마자 흥행 몰이를 하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공개 사흘 만에 전 세계 TV 부문에서도 시청 순위 1위에 오를 만큼 관심이 뜨겁다. 특히 국내에선 아들의 학폭으로 국가수사본부장에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를 둘러싼 논란이 ‘더 글로리’에 대한 관심을 더욱 폭발시켰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청자들은 “정 변호사 아들은 학폭을 저지르고도 서울대에 갔는데, ‘더 글로리’를 보니 그나마 속이 후련하다”며 사적 복수의 완벽한 완성으로 끝난 드라마를 ‘사이다’라며 칭송했다.

흥행 중인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파트2에서 학교폭력 피해를 당하던 어린 문동은이 학폭으로 추락사한 윤소희의 사망 현장을 둘러보다 담임 교사와 통화하는 장면. /넷플릭스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사회

평론가들은 “‘모범택시’나 ‘더 글로리’ 같은 사적 복수극의 흥행은, 현재 한국의 교육 제도와 사법 제도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그만큼 거대하다는 걸 보여준다”고 입을 모았다. 익명을 요구한 문화 평론가는 “정순신 변호사와 아들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의 교육·사법 체계가 이른바 ‘가진 자’ ‘권력이 있는 자’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을 더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며 “오랜 기간 문제로 지적됐는데도 학교 폭력이 반복되고, 가해자가 연예인 등 유명인이 되는 일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드라마에서라도 가해자를 직격하는 사적 복수에 시청자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사적 복수에 대한 열광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철학 전문위원은 “대체로 복수극은 복수하는 사람도 위법이나 부도덕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가 따르는데, 최근 한국에서 흥행하는 복수극에선 그런 딜레마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더 글로리’와 ‘모범택시’의 피해자와 ‘복수 대리인’들은 복수 과정에서 여러 위법과 부도덕을 저지르지만, 이는 ‘가해자의 지독한 악행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 또는 ‘거악을 시원하게 처단하기 위한 재치 있는 수단’ 정도로 치부된다. 또 다른 평론가는 “‘구제 절차가 복잡하고 피해자가 생각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는 듯한 법치주의보다, 가해자를 직접 응징하는 것이 더 확실한 정의’라는 인식이 커지고 있는 것”이라며 “사적 복수를 배격하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위험 신호”라고 했다.

◇“외국에 비하면 솜방망이 처벌”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이 학폭 논란에도 정시로 서울대에 진학한 데 분개하는 여론이 커지자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정시에도 학폭 징계 전력을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법조계에서도 “학폭에 대한 형사처벌은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내 1호 학폭 전문 변호사인 노윤호 변호사는 “미국이라면 강력한 형사처벌을 받는 학폭 행위가 한국에서는 대부분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집행유예 판결이 나거나 기소유예, 전과가 남지 않는 보호처분으로 끝난다”며 “외국과 비교하면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육계와 법조계 모두 “학폭을 대입과 연계하는 정부의 대책은 부작용이 더 클 것”이라고 했다. 한 고교 교사는 “부유층이 많은 지역의 고등학교에서는 학폭으로 입시에서 불이익 당하는 걸 피하기 위해 정순신 가족처럼 학교와 교육청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며 “대입에 학폭 전력을 많이 반영할수록 오히려 학교나 교육청 처분에 불복하는 경향이 강해질텐데, 그것이 과연 피해 학생을 구제하는 것인지, 가해 학생에게는 교육적인지도 의문스럽다”고 했다.

노정태 위원은 “지금처럼 입시에 벌칙을 가하겠다는 학폭 대책은 한국 학생들이 모두 대입에 매여 있다는 걸 전제한 것”이라며 “입시에 큰 관심이 없는 학생들의 학폭은 어떻게 할 것인지, 그들은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완전히 열외된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명확한 정의와 기준 없는 한국의 학폭

학폭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커지면서 이른바 ‘학폭 미투’도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더 글로리’를 연출한 안길호 PD도 필리핀 유학 시절인 1996년 당시 여자 친구를 놀린 학생을 폭행한 사실이 드러나 사과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런 것까지 학폭으로 볼 수 있느냐”는 반론도 제기됐다.

교육계에서는 “학교 폭력의 정의조차 명확하지 않다 보니 소모적 논쟁이 벌어진다”는 반응이다. 교사 겸 작가인 권재원씨는 “핀란드 등 북유럽에서는 ‘비대칭적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피해를 끼치는 행위’로 학폭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는 반면 한국의 학폭법은 가해자가 누구인지, 가해 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한 30대 고교 교사는 “학교 폭력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이라 학교에서는 교사의 지도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다툼·장난도 학폭으로 신고돼 학부모들의 싸움으로 불필요하게 커지는 실정”이라며 “사소한 감정 다툼이나 친구 간 갈등을 조정하는 법을 배우고 훈련해야 할 시기인데, 학폭 제도의 모순으로 이런 과정이 싹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 교사의 교육적 개입 없이 처벌 강화만 능사?

‘더 글로리’에서 학폭 피해자인 윤소희와 문동은은 가혹한 학폭에도 주변 친구들과 교사에게 철저히 외면당한다. 문동은이 사적 복수를 꿈꾸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노윤호 변호사는 “그런 외면을 없애는 것, 학폭에 다수가 침묵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게 학교 폭력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학교 폭력 가해자를 학생 다수가 묵인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제지하고, 가해 학생이 ‘힘 있는 소수’가 아니라 ‘문제 있는 소수’가 되도록 압력을 형성하는 교육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교육계에서는 “학폭 관련 제도에 상실된 교육적 취지를 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학폭위 때문에 교사의 교육적 개입이 아예 점점 더 차단되고 있다는 것. 서울의 한 여교 교사는 “여러 학생이 한 학생 급식판에 쓰레기를 던지는 모습을 보고 혼을 냈더니 교장이 ‘학폭위가 알아서 할 일을 왜 담임이 개입하느냐’며 화를 내더라”며 “교육자로서 회의가 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고교 교사는 “학생끼리 화해한 상황에서 학부모들에게 ‘학폭위까지 가지 말자’고 하면 ‘왜 교사가 가해자 편을 드느냐’는 식으로 항의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보니 ‘학폭 신고 들어오면 그냥 교육청으로 넘기는 게 속 편하다’는 인식이 퍼져있다”고 말했다.

한 사립고 교사는 “학폭 사건을 해결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가해 학생이 잘못을 깨닫고 피해 학생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도록 하는 교육적 과정”이라며 “지금은 양측이 사실관계만 다투느라 학교와 교육청이 일종의 ‘사건 조서’를 쓰는 데 급급한데, 정작 정부는 처벌 강화와 소위 ‘낙인찍기’만 밀어붙이니 답답하다”고 했다. 노윤호 변호사는 “처벌 강화도 중요하지만 학폭 피해 학생이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방안이 더 시급하다”고 말했다.

[배준용 주말뉴스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