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의 말(馬)편자(Bohr’s Horseshoe)’라는 말이 있다. 닐스 보어(Niels Bohr·1885~1962)에서 유래한다. 덴마크 물리학자로 1922년, 37세 젊은 나이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천재였다. 그의 별장 현관 입구에 말편자가 걸려 있었다. 말편자는 유럽에서 행운을 가져다준다 하여 현관 입구에 걸어두었다. 보어의 별장 방문객이 이를 보고 물었다.

“말편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습니까?” “믿지는 않지요. 그러나 믿든 안 믿든 그것이 행운을 가져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표현은 다르나 “보어가 말편자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1901~1976)는 그의 저서 <부분과 전체>에서 밝힌다. 하이젠베르크 역시 천재 물리학자로 31세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도 대학 시절부터 별장에 초대받았기에 ‘말편자’를 알고 있었다. 보어가 ‘말편자 행운설’을 믿은 것은 분명하다. 또 그는 주역의 태극 문양을 가문의 문장으로 삼을 정도로 주역 점을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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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과 불운으로 나뉘는 운(luck)은 “역사를 관통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직조해온 황금의 실”이었다.(S. D. 헤일스, ‘운이란 무엇인가’). 성공=재능+노력+운, 실패=재능+노력-운이란 등식은 동서고금을 통한 보편적 공식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점성가, 풍수가, 예언가뿐만 아니라 종교인과 자기 계발 전문가들도 행운을 부르고 불운을 쫓는 방법을 설파했다. 이른바 피흉추길(避凶趨吉)의 행위들이다. 부적을 쓰거나 굿을 하거나 조상 산소를 이장하거나 카메오(cameo·장신구)를 차거나 그 방법들이 다양하다. 또 많은 개운서(開運書)가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런데, ‘운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의문은 제기된 적이 없었다. 동서고금의 철학자, 역사학자, 정치가, 시인들은 운을 ‘축복’하거나 ‘저주’했을 뿐이다. 그들은 한탄하곤 했다. ‘인간의 계획을 흩트려 놓는 것이 운이다’,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지혜가 아닌 운이다’, ‘운은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영웅도 운이 다하면 어쩔 수 없다’….

대학에서 문사철(文史哲) 학과들이 소멸하는 지금, 거리의 ‘동양철학’은 더욱더 성업 중이다. 왜 강단학파가 거리의 ‘동양철학파’에게 밀리는가? ‘운’과 같은 오래된 화두를 학적 대상으로 삼지 않은 탓은 아닌가? 운의 존재 여부와 그 현상(現象) 방식을 논하는 것은 ‘도를 믿으시는 분들’의 관심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최근 ‘운의 존재론’과 대응 방식을 철학적으로 논한 학술서가 나왔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블룸스버그 대학 철학과 헤일스(S. D. Hales) 교수의 ‘The Myth of Luck’이다(국내에 ‘운이란 무엇인가’로 번역·출간). 그는 운의 존재 여부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부터 중세 신학자·근대철학자·수학자·과학자들의 언술을 바탕으로 밝히려 했다.

헤일스 교수는 운에 대한 인간의 대응 방식을 3가지로 유형화했다. 운에 순종하는 유형, 운에 반항하는 유형, 운 자체가 의미 없다는 유형이다. 운에 순종하는 유형은 다양한 부적으로 행운을 부르려 한다. 닐스 보어의 ‘말편자’도 첫 번째 유형으로 이른바 ‘부적파’이다. 운에 반항하는 유형은 인간의 욕망을 죽이는 금욕 생활로 운의 간섭을 차단하려 한다. 스토아학파가 대표적이다. 마지막 유형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한 오이디푸스 왕처럼 예정된 운명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유형이다. 이 경우 운을 바꾸려는 노력은 의미가 없다.

운에 관해 누구 말을 따라야 할까? 18세기 독일 철학자 피히테(J.G.Fichte)는 말한다. “어떤 철학을 선택하느냐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Was für eine Philosophie man wähle, hängt sonach davon ab, was man für ein Mensch 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