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대 명물 ‘무당이 버스’는 이길여 총장이 학생들을 위해 직접 아이디어를 내 만든 것이다. 이 총장은 “아낌없이 주면 자란다는 게 내 지론”이라며 “나 역시 어머님을 통해 이를 배웠다”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남자 이름이 왜 이길여야?”

1951년 전북 전주 전시연합대학 정문에 붙은 합격자 방(榜)을 보고 사람들이 쑥덕거렸다. 6·25 전쟁으로 대학 수업이 어려워지자 문교부(현 교육부)는 각 피란지에서 교수와 학생이 연합대학을 형성해 교육받을 수 있게 했다. 후방인 부산·광주·전주 등에 전시연합대학이 세워졌다. 여기에 속했던 서울대도 ‘방’을 붙여 신입생을 발표했다.

사람들은 여자가 서울 의대에 합격했다가 아니라, 서울 의대에 합격한 어떤 남학생 이름이 여자 이름 같다고 믿었다. 여학생이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다는 건 당시로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해 서울대 의대 신입생 120명 중 여학생은 9명. 그마저도 전쟁으로 남학생이 줄어 예외적인 경우였다.

물론, 이길여는 남자가 아니다. 이 여학생은 추후 가천의대 길병원·가천문화재단을 포함한 국내 최대 공익재단인 가천길재단 회장이자, 대학 개혁의 상징인 가천대 총장이 된다. 지난해 구순을 맞은 그는 대담 형식의 회고집 ‘길을 묻다(샘터)’를 최근 출간했다.

경기도 성남 가천대 교정에서 만난 이길여 총장은 꼿꼿하고 카랑카랑했다. 지팡이·보청기·임플란트 등 노년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요즘 20대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길여는 ‘별에서 온 총장님’이라 불리며 아이돌급 인기를 누린다고 한다. 지난해 가천대 신입생 환영사 동영상은 10만 조회수를 넘어섰다. 이 영상엔 ‘90세의 외모도 놀랍지만, 메타버스·인공지능에 반도체 산업 흐름까지 알고 언급하신다는 게 더 놀랍다’ 등 댓글 280여 개가 달렸다.

◇가천대의 아이돌, 별에서 온 총장님

-학생들이 총장을 ‘가천대 아이돌’이라고 하더라. 가천학원 산하 신명여고 졸업식 영상을 보면 여고생들이 총장님을 보고 연예인 만난 듯 환호한다.

“난 우리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럽다. 나야 결혼도 안 하고, 가족도 없고 다른 생각 할 게 뭐 있겠나. 오로지 아이들, 병원에선 환자들만 생각한다. 그 사랑이 가서 닿는 것 같다.”

가천대엔 캠퍼스 곳곳을 누비는 ‘무당벌레 버스’가 있다. 통합 가천대를 출범하며 이길여 총장이 학생들에게 선물로 준비한 소형 전기 버스다. 버스를 만들기 위해 이 총장이 직접 여러 자동차 회사는 물론, 서울랜드·에버랜드까지 찾아다녔다. 신명여고를 인수했을 땐 화장실부터 싹 뜯어고쳤다.

-무당벌레 버스 아이디어를 직접 내셨다던데.

“우리 학교 부지가 넓은 데다 오르막이 좀 있다. 셔틀버스를 만들까도 했는데, 그때 모 대학에서 버스 사고가 났다. 버스보단 작으면서, 안전하고, 친환경적인 이동 수단으로 생각한 게 ‘무당이 버스’다. 디자인은 예전에 내가 시애틀에서 본 엘리베이터에서 착안했다. 하얀 빌딩에 빨간 무당벌레가 왔다갔다 하는데, 너무 예뻐서 내가 만약 건물을 짓는다면 꼭 무당이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버스로 온 것이다(웃음).”

-지하철 가천대역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나 볼 법한 인공 하늘이 있다.

“실제 라스베이거스 시저팰리스 호텔의 건축 공법인 스카이실링에서 영감을 받았다. 아이들이 18m 굴 속이 아닌 즐거운 공간을 지나다니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라스베이거스에 가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아이디어가 나온 다음 날 바로 라스베이거스로 떠났다. 1박4일 출장이었다. 담당자들에겐 아직까지 너무 미안하다. 그 먼 곳까지 가서 일만 하고 왔으니. 요즘에도 당시 직원들을 만나면 사과하기 바쁘다.”

-1박4일?

“하루가, 한시가 급하니까. 빨리 만들어야 하니 거기서 관광하며 머물 시간이 없었다.”

이길여 총장의 강력한 추진력은 가천대의 혁신 비결로도 꼽힌다. 가천대는 10년 전 4개 대학(가천의대·가천길대학·경원대·경원전문대)을 통폐합해 정원 3000명을 줄이고 학과 40%를 줄이는 대대적인 개혁에 성공했다. 100위권 밖이었던 대학 순위가 종합 20위권 안으로 껑충 뛰었다.

-대학 사회가 변화하기 어려운 곳인데 어떻게 혁신을 주도하셨나.

“초창기엔 모두가 반대했다. 교수와 관계자들을 일대일로 만나 매일같이 설득했다. ‘우리는 여기까지 잘 살았지만, 앞으로 우리 제자들 앞날은 어떻게 되겠나. 그 세계는 엄청나게 변할 텐데, 거기에 대한 대비를 지금 우리가 해야 한다.’ 반대하는 분들이 차츰 태도를 바꾸더라. 지금은 일심동체. 내 말 듣고 해보니 되거든(웃음).”

-지방대 위기에 대한 우려가 어느 때보다 크다.

“더 일찍 대비했어야 한다고 본다. 대학을 맡으면서 10년, 20년, 30년 후까지 사회가 어떻게 될지 예측하려고 노력했다. 제자들은 우리 자식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부모는 자식들 앞날이 어떻게 될지 늘 염려하고 대비한다. 국내 대학 최초로 설치한 인공지능(AI) 학과가 그 고민의 산물이다.”

◇가슴에 청진기를 품고 다닌 의사

이길여는 전북 옥구군 대야면(현 군산시) 정미소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우리말을 쓰면 뺨을 맞던 일제 식민지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졸업 무렵 도둑처럼 해방을 맞이했다. 중학교 시절은 늘 암살·폭동·반탁 운동 등으로 어수선했다. 고3 땐 6·25가 터져 방공호에 들어가 입시 공부를 했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은 전시 상황에 따라 전주·부산·서울로 옮겨 다녔다.

-왜 산부인과를 선택했나.

“당시만 해도 남자 의사를 내외해서 병원을 안 찾는 여성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간단한 병이 심각해지고, 산후 조리를 소홀히 해서 일생 후유증에 시달리는 여자들도 많았다. 이들을 돌봐주고 싶었다.”

이길여 총장은 “의사가 돼 많은 사람을 치료해 주는 게 내 삶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이를 소망했다. 다리가 부러진 고양이를 데려와 부목을 대고 빨간약을 발라줬고, 친구들이 아프다고 하면 할머니가 하듯 배를 문질러줬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졸업 후엔 인천시 중구 용동에 산부인과를 개원했다. 베이비붐의 상징인 ‘58년 개띠’들이 한 해 약 100만명씩 태어나던 해였다.

-’가슴에 청진기를 품고 다니는 의사'로 유명해진 게 이때부터인가?

“그 당시엔 난방시설이 제대로 안 돼 겨울이면 굉장히 추웠다. 차가운 청진기 금속이 몸에 닿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는 환자를 본 후 청진기를 가슴에 품어 체온으로 덥혀 진료했다.”

이어령 교수는 2010년 9월 한 강연에서 이 총장을 이렇게 소개했다. “중국 삼자경엔 효심이 지극한 어린 황향이 아버지 이부자리를 몸으로 덥힌다는 고사가 나온다. 일본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군의 발이 시리지 않도록 신발을 품고 다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국엔 환자가 춥지 않도록 가슴에 청진기를 품고 지낸 의사가 있다. 타인 중에도 특히 약한 자, 환자를 배려하는 마음은 중국 일본의 고사에 비길 일이 아니다.”

- 내진(內診)을 위해 늘 손의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했다고도 하더라.

“산부인과는 몸속에 손을 넣어 진료하는 내진이 많다. 이게 얼마나 불편하겠나. 내 손이라도 따뜻하면 환자들이 더 편안하게 진료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늘 따뜻한 물을 옆에 두고 손을 담근 후 진료했다. 그러니 뭐 청진기 품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었다(웃음).”

1957년 군산도립병원에서 수련의 생활을 할 때 만난 ‘퀘이커 의료 봉사단’의 골든 박사와 이길여 총장./가천대

이길여가 애초 개원을 한 건, 미국 유학 갈 비용을 벌기 위해서였다. 중2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정미소를 처분하고, 땅과 논을 팔아서 학비를 댔다. 대학 다닐 때는 어머니가 아직 여물지 않은 벼를 수확해 ‘오리쌀(올해 쌀)’로 등록금을 만들었다. 9월에 학비를 내야 하니, 아직 뜨물이 나는 벼를 30% 손실을 보고 팔았다. 유학까지 보내달랄 순 없었다.

-왜 미국이었나.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미국 선진 의료가 정말 배우고 싶었다. 환자들과 지내다 보니 이 시기가 차일피일 미뤄져, 1964년에야 뉴욕으로 갔다. 메리 이머큘리트 병원과 퀸스 종합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쳤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만 가면 그대로 눌러앉는 유학생이 많았다. ECFMG(미 의대 졸업생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받는 시험) 합격 통지서는 미국 비자 이상이었다. 왜 돌아오셨나.

“미국으로 떠날 때 당시 병원이 초상집 같았다. 거의 한 달 동안 환자들이 가지 말라고 내 치맛자락을 붙들며 울었다. 환자들과 약속했다. 100% 다시 돌아오겠다고, 5년만 참아달라고. 내가 그런 환자들을 두고 미국에 남을 수 있겠나.”

-미국에 남아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엄청났을 텐데.

“지옥과 천국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한국에선 거즈나 기저귀 같은 건 누더기가 될 때까지 삶아서 다시 썼다. 주사기는 매일 밤 소독하고, 주삿바늘은 숫돌에 갈아 재사용했다. 미국에선 한 번 사용한 주사기는 그냥 버리더라. 머릿속으로 매일 전쟁이 일어났다. 이렇게 좋은 나라를 왜 떠나야 하느냐는 마음과, 내가 어떻게 의사가 됐는데 나만 호의호식할 수 없다는 마음이 매일 싸웠다.”

- ‘어떻게 의사가 됐는데’란 말이 무슨 뜻인가.

“지금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해야지’ 하는 게 꿈일 수 있지만, 일제 치하에서 태어난 우리는 늘 ‘내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했다. 나만 한 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그래서 6·25가 터졌을 때도 타의 반 자의 반으로 모두 학도병으로 나갔다.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나도 100%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편안하게 공부를 했다. 전쟁에 나간 남자 동기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사회와 친구들에게 빚을 져서 의사가 됐다.”

◇보증금이 없는 병원

다시 한국에 돌아온 이길여는 아예 ‘보증금 없는 병원’이란 종이를 병원 문에 커다랗게 써 붙였다. 당시는 건강보험이 없어, 진료를 받고도 병원비를 못 내는 환자가 많았다. 병원으로선 최소한의 보증금이 안전장치로 필요한 때였다.

-왜 보증금을 받지 않았나.

“그 당시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 지금 아프리카에서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비쩍 말라 죽어가듯, 그때 우리가 그랬다.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병들면 그냥 죽는 비참한 시대였다. 자궁으로 들어간 균이 복강으로 퍼져서 복막염이 돼, 패혈증으로 죽어갔다. 항생제 주사만 맞으면 100% 살 수 있는데. 내가 의사가 된 건, 그런 불쌍한 사람들 살리기 위해서였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었다.”

-병원비를 낼 수 없는 가난한 환자 카드엔 아예 ‘ㅡ’ 자 표시를 해놓았다더라. 병원비를 받지 않기 위해서. 재정적으로 어렵진 않았나.

“참 신기한 게, 무료로 환자를 봐준다고 하니 입소문이 나더라. ‘용한 병원’으로(웃음). 돈 없는 환자뿐 아니라 돈 있는 사람들도 엄청 몰려들었다. 병원에서 먹고 자며 하루에 많게는 300명까지 환자를 봤다.”

이길여는 회고록 ‘길을 묻다’에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젊었을 때는 공부와 일에 빠져 있었고, 개원의가 돼서는 환자에 빠져 살았다.”

이길여 총장은 매해 가천 의대 졸업생에게 청진기를 목에 걸어 선물해준다./가천대

-우울증이 찾아온 것도 이 시기였다.

“그땐 우울증인 것도 몰랐다. 8차선 고속도로에서 벤츠를 타고 최고 속도로 막 달리다가 큰 돌덩이에 탁 부딪친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당시 여자에게 결혼은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이 마흔 넘어 남들 다한다는 결혼도 못 하고, 도대체 나는 뭐 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고등학교 때 그 꿈 많던 소녀는 어디 갔나, 이렇게 개원의로 내 인생이 끝나는 건가, 허망한 마음도 들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해 일본 니혼대로 다시 유학을 갔다. 거기서 해결책을 찾았다.”

-어떤 해결책이었나.

“일본 의료 수준을 직접 체험하면서 산부인과를 종합병원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의료 취약지에 병원을 세우다

그렇게 문을 연 병원이 1979년 개원한 인천 길병원이다. 이 총장을 늘 지지했던 어머니가 처음으로 반대했던 일이기도 하다. 종합병원을 만들기 위해선 의료법인을 세워야 했는데, 의료법인 설립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어머니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딸이 혼자 살려면 경제력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총장이 ‘의사니까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는다’며 석 달을 설득한 끝에, 어머니 허락을 얻어냈다.

-이후 적자를 감수하고 양평, 철원, 백령도에도 병원을 세웠다.

“1980년대만 해도 양평은 경기도에서 가장 못사는 곳이었다. 정부가 나서서 몇 군데 큰 병원에다 맡기려고 했는데, 다들 하지 않겠다고 했다. 100% 적자가 나는데 정부가 하란다고 하겠나. 그렇게 2년을 표류하더니, 당시 복지부에 있던 서울대 2년 후배가 나를 찾아왔다. ‘선배는 결혼도 안 하고 가족도 없는데 돈 벌어서 뭐할 거냐. 지금은 의료보험이 다 돼 무료 병원은 못 지으니 양평을 맡아 달라’고 하더라. 내 원래 꿈이 고향에 무료 병원 짓는 거였다. 논리 정연하게 내 아픈 곳을 찌른 것이다.”

철원과 백령도 길병원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당시 철원은 주민들 소원이 ‘첫 번째가 통일, 두 번째가 병원’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로 의료 취약지였다. 백령도는 산부인과 시절 맺었던 환자와의 인연이 계기가 됐다. 당시 백령도에선 인천까지 가려면 꼬박 하루가 넘게 걸렸다. 자연유산으로 출혈이 멈추지 않아 거의 사망 직전까지 간 환자를 겨우 살린 일이 있었다.

-당시 세 병원의 적자만도 한 해 수억원에 달했다더라.

“다른 곳에서 흑자를 내, 적자를 메꿨다. 그렇지만 지금도 ‘참 훌륭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양평을 그렇게 했더니, 나에게 돌아오는 게 굉장히 많았다. 인천 길병원 다음으로 만든 병원이 인천 구월동 중앙길병원이다. 인천에서 종합병원을 시작하면서 나는 ‘우리나라에 산재 환자가 이렇게 많구나’ 하는 걸 알게 됐다. 공장이 많았던 인천이란 특성상 그랬을 것이다. 이 사람들을 위한 전문병원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구월동에 중앙길병원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지금은 인천의 강남으로 천지개벽했다. 좋은 일 하니까 복을 받더라, 하하!”

요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 총장은 웬만한 아이돌급 인기를 누린다. 불멸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룬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패러디해 '별에서 온 총장님'으로 불리기도 한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다시 태어나면, 퀴리부인 같은 연구자로

이길여 총장은 1994년 간호대학인 경기전문대학과 신명여고가 있는 신명학원을 인수하면서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가천의대를 설립하고, 경원대와 경원전문대가 포함된 경원학원을 인수한다. 이 네 대학이 합쳐진 것이 통합 가천대다.

-학교를 인수한 이유가 있나.

“원래 나는 가르치는 걸 좋아했다. 의료 법인을 만들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인턴·레지던트와 조산사를 가르치는 수련 병원을 만든 것이다. 좋은 의사와 간호사를 길러내고 싶었다. 의술과 인술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치권에서 숱한 러브콜을 받으셨다.

“의사로 시작해 의사로 생을 마감한다는 게 내 첫 번째 철칙이다. 정치는 소질도 없고, 나와 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 같다. 정치를 안 한 건 지금도 너무 잘했다고 생각한다.”

-성공의 원천으로 늘 어머니를 꼽으시더라.

“어머니가 나를 늘 그리워하셨는데, 난 바쁘단 핑계로 어머니 옆에 있어 드리질 못했다. 어머니를 업고 다니면서 일을 할걸, 후회가 많이 된다. 어머니를 다시 뵐 수 있다면, 꼭 안아 드리며 너무너무 잘못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어머니 차순녀(왼쪽) 여사와 어린 시절 이길여 총장. /가천대

-앞으로 남은 목표가 있으시다면.

“아이들이 성장하는 학교를 만들고, 병원도 발전시키는 것. 내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건강이 망가지기 전까진 그래야 하지 않겠나.”

-동안(童顔)의 비결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극히 평범한 것들을 잘 지키려고 노력한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물을 많이 마시며, 술·담배 하지 않기 같은 것.”

-수능 만점자가 ‘수업시간에 열심히 들었어요’라고 답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기자들이 나랑 인터뷰하면 재미없다고 하는 모양이다, 하하! 내가 좀 모범생 같은 면이 있다. 매일 한 시간씩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반드시 운동은 한다.”

-만약 1930년대 한반도가 아닌, 선진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려서부터 늘 퀴리부인을 동경했다. 원 없이 하고 싶은 연구 실컷 하며 살지 않았을까.”

-인생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태어나려면 수십만개의 정자가 엄청난 경쟁을 뚫고 하나의 난자와 만나야 한다. 이렇게 소중한 생명이, 그저 아무 의미없이 태어나겠나. 반드시 사람은 자신만의 중요한 소명을 타고 난다. 그러니 헛되이 살아선 안 된다. 내겐 그 소명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