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대나무 숲속 홀로 앉아/거문고 타며 거듭 길게 읊조린다/깊은 숲속에 있어 남들 알아보지 않는데/밝은 달만은 찾아와 나를 마주 비추는구나(獨坐幽篁裏, 彈琴復長嘯, 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 –왕유(王維)의 시 ‘죽리관(竹里館)’
자칫하면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자기는 입체적이고 남은 평면적이라고. 자기는 심층적이고 남은 피상적이라고. 나는 고뇌하는데 남은 노닌다고. 내 고통은 우물처럼 깊지만, 남의 고통은 습자지처럼 얇다고. 이렇게 상대를 자기 기분 데워 줄 땔감 취급을 하고 나면, 상대를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읽어버리고 나면, 당장의 기분이야 흡족할 것이다. 나는 이해했고, 상대는 이해당했으니까. 이해한 당신은 이해당한 타인보다 인지적 우위에 섰으니까.
타인은 내 마음을 데워 줄 땔감이기 이전에 하나의 입체적인 인격이다. 텍스트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을 자극해 줄 땔감이기 이전에 하나의 입체적인 작품이다. 물론 눈만 뜨면 오감을 공략하는 콘텐트들이 난무한다. 그 콘텐트들 속을 유영하다 보면 세상만사가 다 자극의 원천으로 보인다. 자극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그러나 텍스트는 내 기분을 맞춰줄 피상적인 자극체이기 이전에 해석을 기다리는 입체적인 세계다. 그 세계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호오의 감정을 잠시 거두고 그 세계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야 한다.
중국 당나라의 시인 왕유의 유명한 시 ‘죽리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얼핏 보면, ‘죽리관’은 왕유라는 사람이 시원한 대숲에 앉아 느긋하게 달구경 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 같다. 팔자 좋군! 과로에 시달리는 사람은 버럭 화를 낼지도 모른다. ‘꿀을 빨고’ 있군! 바쁘기로는 세계 제일인 한국 사람은 대나무 숲에서 혼자 ‘힐링’을 누리는 왕유가 부러울지 모른다. 부럽기 짝이 없군! 한 걸음 더 나아가, 왕유의 여유와 한가로움을 시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깟 한가로움을 노래한 시라면, 애써 저 케케묵은 한시를 읽을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정치적 자아실현의 통로가 관직밖에 없는 세상을 왕유가 살았다면? 하필 왕유는 정치적 야심이 적지 않은 인물이었다면? 권력의 달콤한 맛을 알 만큼 아는 인물이었다면? 정치인의 아귀다툼에 밀려 시골로 쫓겨 온 신세라면? 모든 것이 지겨워 한때 중이 되고 싶었던 인물이라면?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면, ‘죽리관’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저 시에는 한가함뿐 아니라 잘게 다져 넣은 괴로움이 스며 있다. 쾌락과 고통, 여유와 외로움, 세속과 초월, 밝음과 어두움이 교차하여 만든 입체적인 세계가 있다.
글은 언제 입체적으로 보이는가? 대구와 리듬이 살 때 입체적으로 보인다. 사람도 그렇지 않던가. 말과 행동이 대구를 이루고, 일상에 리듬이 있는 사람은 입체적으로 보인다. ‘죽리관’에서도 대숲의 어두움과 달의 밝음이 대조를 이루고, 알아주지 않는 남과 알아주길 기다리는 내가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그 대조들이 모여 리듬을 만든다.
글은 언제 입체적인 깊이를 얻는가? 각 부분 사이에 (예상치 못한) 관계가 맺어질 때 입체적이 된다. 사람도 그렇지 않던가. 노숙한 지혜와 천진한 심성이 호응할 때, 그는 그냥 노숙한 사람이나 천진한 사람보다 더 입체적으로 보인다. ‘죽리관’에서도 ‘홀로[獨]’라는 말이 홀로 있지 않고 ‘마주[相]’라는 말과 호응하기에 작품이 입체적이게 된다. “마주 비춘다”고 해서, 달이 왕유를 비추듯, 왕유도 달을 비춘다는 말은 아니다. ‘마주’ 혹은 ‘서로[相]’라는 말은 왕유가 달빛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드러낸다. 달빛을 받기로 하자면, 달빛 아래 모든 사물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사물과 왕유가 다른 점은 왕유는 자신이 달빛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깨달음을 통해 달은 왕유의 벗이 되고, 마침내 왕유는 외로운 상태에서 벗어난다.
글은 언제 입체적으로 느껴지는가? 어떤 대상이 정지해 있지 않고 궤적을 그릴 때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사람도 그렇지 않던가. 그저 배경처럼 가만히 있는 사람은 벽지와도 같다. 감응하고 움직일 때 비로소 그는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죽리관’에서 달은 정지된 배경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배경으로 알았던 무대 장식이 갑자기 난입해서 하나의 배우가 되는 것처럼, 달은 거문고와 시 읊는 소리에 감응하여 대나무 숲으로 난입한다. 달 역시 왕유만큼 외로운 존재였는지 모른다. 자신의 빛을 인지한 사람 덕분에 비로소 그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글에는 언제 입체적인 맥락이 생기는가? 한마디 말에 하나 이상의 의미가 담길 때 그렇다. 사람도 그렇지 않던가. 농담에 뼈를 심을 때 그의 말은 입체적이다. “남들 알아보지 않는데[人不知]”라는 말이 그저 숲속에 있으니 사람 눈에 띄지 않는다는 뜻에 불과할까. 왕유는 물론 당시 독자들은 “人不知”라는 표현이 <논어>에도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열받지 않으면 군자가 아닌가(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논어 학이편)”, 즉 “남들 알아보지 않는데”는 자기 소재를 모른다는 말도 되고,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남들 알아보지 않는데”라는 말은 고독함과 아울러 왕유가 인정투쟁 중임을 드러낸다.
글은 언제 입체적이 되는가? 글의 주제가 특수한 동시에 보편적일 때 입체적이 된다. 사람도 그렇지 않던가. 구체적이고 특수한 인물이 보편적인 인간성을 구현하고 있을 때, 그는 입체적으로 보인다. 대나무 숲에서의 고독함이 인정투쟁이라는 인간 보편의 주제에까지 이어졌기에, ‘죽리관’은 한층 입체적으로 보인다. 왕유는 권력자로부터 얻지 못한 인정을 달로부터 얻었는지도 모른다. 달로부터 받은 그 인정은 비정치적 인정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더 확대된 정치적 인정이었을까.
해석한다는 것은 평면적으로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은, 텍스트에서 정보를 취득하는 일과도 다르고, 텍스트에서 자극을 얻는 일과도 다르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입체적인 텍스트 대나무 숲속으로 조심스레 걸어들어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