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낙원구 행복동에서 판잣집을 짓고 살아가는 난쟁이 가족. 어느 날 재개발로 집을 철거당한다. 증조부가 노비였던 아버지는 달나라로 이주하는 상상을 하다가 공장 굴뚝 위에서 추락사하고, 공장 다니는 큰아들은 고용주에게 항의하다 해고된 후 우여곡절 끝에 살인자로 전락하며, 딸은 헐값에 팔려나간 아파트 입주권을 되찾을 목적으로 성적 학대를 견디며 건설 투기꾼과 동거한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줄거리다. ‘난쏘공’이란 약칭으로 유명한 이 소설이 조세희 작가의 별세를 계기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소설은 1978년 초판이 나온 이래 지금까지 300쇄를 찍었고 100만부가 넘게 팔렸다.
난쏘공이 반세기 가까이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까닭은 작가가 폭로한 사회 모순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바로 불평등과 주택 문제다. 난쟁이 가족의 이웃에 살던 지섭은 철거 용역 직원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방금 선생은 오백 년이 걸려 지은 집을 헐어 버렸습니다.” 무허가 판잣집이지만, 이것마저 대대손손 노비였던 조상의 유산으로 가까스로 만들 수 있었다는 한탄이다. 그런데 오늘날 비슷한 탄식이 젊은이들에게서 나온다. “흙수저가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받아 산 아파트 값이 폭락해 파산 직전이다.” 연일 뉴스에 나오는 ‘부동산 영끌’ 이야기다. 난쏘공의 1970년대와 오늘날이 이런 식으로 연결된다.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그랬다.
단,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쟁점이 비슷하다고 원인까지 같은 건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중산층이 보유한 구매력은 50년 전 상위 1% 부자보다 크다. 서울의 주택 보급률은 1970년 57%에서 2020년 95%로 상승했다. 오늘날 주로 쟁점이 되는 불평등 문제는 기여에 비해 더 많은 몫을 챙기는 지대 추구와 관련된다. 서울의 주택 문제는 수백 만 가계가 앉은 자리에서 평생 일해서 벌 소득을 얻거나 잃는 재산상 불안정성이 원인이다.
난쏘공에 나오는 절대적 빈곤과 도시 빈민의 주택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경제적 성장에 따라 그 심각성이 상당히 감소했다. 챙겨야 할 중요한 문제이지만, 다른 쟁점을 지배하는 최상위 문제는 아니다. 난쏘공에 공감한다고 소설 속 상황을 염두에 두고 현실에서 정책을 기획하면 사달이 날 것이다.
그런데 ‘386 운동권’이라고 하는 문재인 전 정부와 민주당 주류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소득 주도 성장론과 기본 소득론은 난쏘공에 나오는 절대적 빈곤층을 염두에 둔 것으로, 오늘날의 불평등 원인인 지대 추구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부동산 정책은 난쏘공의 극악무도한 투기 업자를 상상하며 투기 규제책만 퍼부었을 뿐, 오늘날 대도시 주택 문제의 핵심인 아파트의 재산 성격을 무시했다. 문 전 대통령은 조 작가의 별세를 애도하며 “저를 비롯한 우리 세대는 난쏘공을 읽으며… 실천 의지를 키울 수 있었다”고 소셜미디어(SNS)에 적었는데, 나는 그들이 의지만이 아니라 정책 방향까지 배워왔다고 생각한다. 386 운동권의 세계관은 지금까지도 1970년대 난쏘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소설에 대한 정파적 오독도 문제다. 지난 2일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신년 인사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난쏘공을 선물하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줄 사람이었다”고 책 내지에 적었다. 윤 대통령의 노동 정책을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그런데 저 문구는 큰아들 영수가 위정자들에게 냉소를 보내며 “설혹 무엇을 이룬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라고 읊조린 뒤 한 말이다. 영수는 권력에 하소연하지 않고, 동료들을 모아 사장과 담판을 지으려다 해고된다.
저 인용문은 대통령실이 아니라 노동조합 사무실에 내걸려야 어울린다. 금서(禁書)였던 난쏘공을 숨어서 읽던 사람들이 “고통을 알아주고 나누는 존재”로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1987년 이후의 노동조합이니 말이다. 그 노동조합은 ‘귀족 노조’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고통받는 계층과 괴리돼 있다. 386 이데올로기 안에 갇혀 있는 이정미 대표는 난쏘공을 가지고 보수 정부를 비판하려다 문 정부 인사들과 비슷한 오류에 빠져버린 셈이다.
우리는 난쏘공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최근 한국 정치는 상대를 공격하는 용도로, 또는 자신의 망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현대사를 소환해 소비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난쏘공도 그렇게 소비하려는 것 같아 우려된다. 1970년대 도시 빈민의 삶을 기록한 역사적 소설인 난쏘공을 후대에 소중히 전달하려면, 386 이데올로기에 주의하며 책을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