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1월 25일, 미국 필라델피아. 동네 복싱 클럽에서 작은 시합이 벌어지고 있다. 4라운드 시합에 출전한 록키 발보아(실베스터 스탤론)는 형편없이 밀리다가 반칙성 헤딩을 얻어맞은 후에야 분노의 주먹을 날려 승리를 거둔다. 그래서 버는 돈은 승자 상금 65달러에서 라커와 트레이너비 15달러, 샤워비 5달러와 7퍼센트의 세금을 뺀 40달러 55센트뿐이다. 고리대금업자의 수금원 노릇으로 입에 풀칠을 한다.
그렇게 먹은 나이가 어느덧 서른 살. 매일 아침저녁으로 애완동물 가게에 들러 점원 에이드리언(탈리아 샤이어)에게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것 외에는 삶의 낙이 없다. 권투장 관장 미키(프랑크 패시)는 재능 있는 놈이 깡패짓이나 한다며 록키를 내쫓아버렸다. 하지만 록키의 가슴에는 복싱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다. 단골 술집 사장이 세계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의 인터뷰를 보며 “저 놈은 프로가 아니라 광대야”라고 빈정거리자, 참지 못해 한마디 쏘아붙이고 마는 것이다. “저 남자는 최선을 다해 챔피언이 된 거라고요. 아저씨는 최선을 다한 게 뭐예요?”
<록키>는 미국에서 1977년 개봉한 고전이지만 지금 봐도 여전한 감동을 준다. ‘Gonna Fly High’를 배경음악 삼아 필라델피아 박물관 계단을 뛰어오르는 명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록키는 비참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록키’를 통해 우리는 자기 계발(self-help)의 의미를 온전히 되짚어볼 수 있는 것이다.
자기 계발이라는 개념은 스코틀랜드의 작가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自助論)을 통해 유명해졌다. 여러 위인들의 사례를 통해 끈기 있게 도전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책이다. 그 기원이 이렇다 보니 자기 계발은 철학의 모든 담론 중 가장 저평가되고 있다. 그럴듯한 명언을 주워섬기며 ‘열심히 일해서 돈 벌자 파이팅’ 같은 내용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대중 출판의 한 분야로 평가절하되기 일쑤다. 대다수 자기 계발 서적들은 그런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자기 계발은 진지하게 고찰할 가치가 있는 개념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self-help’는 1800년대 법률 문서에서 처음 등장했다. 사람에게는 적법한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해악을 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일반 원칙을 드러낸 것이다. 이 법률 용어는 미국의 철학자 랠프 왈도 에머슨 등 여러 문필가의 손을 거쳐 ‘사람은 스스로를 도와야 한다’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자’ 같은 의미를 지니는 합성명사로 재탄생했다. 이후 <자조론>이 나오고 큰 성공을 거두면서 자기 계발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대 로마의 스토아 철학처럼 구체적인 삶의 조언을 제공하는 철학은 역사적으로 드물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기 계발이 등장하고 각광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평등한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의 신분과 직업을 지니고 살았던 시절에는 자기 계발을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산업혁명과 미국 독립, 프랑스 혁명으로 열린 새로운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신대륙처럼 펼쳐진 인생의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자기 머리로 생각하며 두 손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만 했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며, 내 인생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남의 도움을 절대 받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존심을 굽히며 고집을 꺾고 다른 이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때도 있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며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조론>의 첫 문장이 19세기를 넘어 21세기의 독자들에게도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다.
록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불과 5주 후인 내년 1월 1일,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 시합이 열린다. 46전 무패에 빛나는 세계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와 맞붙어야 한다. 평생 원하던 ‘한 방’을 날릴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록키는 지금껏 4라운드 시합밖에 해본 적 없는 필라델피아의 반건달 삼류 복서에 불과하다. 그를 훈련시키고 관리해줄 코치와 매니저가 절실한 것이다.
미키는 록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야멸차게 쫓아낼 때는 언제고, 록키의 방에 찾아와 본인의 전성기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자신을 매니저로 고용하라고 설득한다. 록키의 서운한 마음이 폭발한다. “영감님은 전성기라도 있었죠. 난 전성기도 없었어요!” 하지만 자존심만 내세울 수는 없는 일. 스스로를 도우려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해야 한다. 록키는 풀죽은 뒷모습으로 돌아가는 미키를 향해 소리치며 따라가서 붙잡는다. “이길 거예요! 이길 거라고요! 날 도와주고 싶어요? 그럼 도와줘요!”
영화 속 록키는 15라운드를 버텨냈지만 판정패했다. 하지만 때로 현실은 영화보다 더욱 극적인 법. 상대가 안 될 것 같은 상대에게 맞서 승리를 거두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특히 지난 2022년이 그랬다. 스스로 임명한 검찰총장을 쫓아내기 위해 발악하는 권력 앞에서 윤석열은 “체중이 100킬로그램이라 흔들어도 안 흔들린다”며 의연하게 맞섰고, 처음 출마한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승 후보 포르투갈을 꺾고 경우의 수를 이겨내며 16강에 진출했다. 언제나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데프트(김혁규)는 결국 롤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가 인터뷰에서 했다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지난해보다 더 고된 한 해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은행은 어두운 경제 전망을 제시한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갈등 등 대외 여건은 나아질 기미가 없고, 북한은 끝없이 핵으로 우리를 위협하는데, 여당의 무능과 야당의 고집으로 정치는 사실상 마비된 상태다. 어쩌겠는가. 복싱 선수는 시합을 고를 수 있지만 인생이라는 싸움은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법. 묵묵히 마우스피스를 깨물며 다시 링 위에 서는, 우리 모두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