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편의점엔 독특한 추임새를 넣는 손님이 있다. 이분은 “이렇게 하나 배우네요”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예컨대 이렇다. 당장은 하나만 필요한데 1+1이나 2+1 이벤트가 걸린 상품을 구입할 때는 뭔가 곤혹스럽고 손해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럴 땐 휴대폰에 편의점 앱을 깔고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아무 편의점에서나 나머지를 가져가시면 된다고 알려드렸더니 대단히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하나 배우네요” 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는 일이다. 한번은 계산대 앞에서 굼뜨게 자꾸 뭉그적거렸다. 뒤에는 손님이 여럿 기다리고 있었다. 왜 그러시는가 했더니 가격 할인을 받을 수 있는 이동통신사 앱을 여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간신히 계산을 마친 손님의 말씀. “이렇게 하나 배우네요.” 뭘 배웠다는 말씀이십니까라는 눈빛으로 바라봤더니 “휴대폰 업데이트는 수시로 해둬야겠습니다”라며 겸연쩍은 웃음을 보인다.
이뿐 아니다. 리치, 애플망고, 샤인머스캣 등 여러 종류 맛이 있는 젤리의 모든 맛을 다 고르더니 다음에 방문했을 때는 애플망고 하나만 구입했다. 그 이유가 특별히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손님이 하시는 말씀. “이게 제일 맛있었어요.” 어김없이 따르는 추임새. “이렇게 또 하나 배우네요.” 이 정도면 배움의 신(神). 뭐든 배우고 깨달으려는 초긍정의 자세 아닌가. 나는 손님에게 마음속 별명을 붙였다. ‘배우네요’ 손님. 이분은 직장에서 상사에게 혼나도 “고맙습니다. 이렇게 하나 배우네요” 하며 밉지 않게 웃을 것만 같다. 그런 풍경이 훤히 그려지는 미소 또한 지녔다.
재치 있는 말주변으로 주위를 푸근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며칠 전, 아침 댓바람에 손님이 밀려 정신이 혼미했나 보다. 어떤 출판사 편집자에게 보내야 할 원고를 다른 매체 편집자에게 잘못 보내 버렸다. 원고를 받은 편집자가 보내온 답장. “첫 독자가 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원고 잘 봤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슬기로운 답장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배려하는 말솜씨도 있다. 팔자에 없는 라디오 방송 출연을 하게 되어 대기실에 기다리는데 옆에 앉은 사람이 유명한 성우였다. 통성명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눅이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내가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언급하며 목소리가 참 재밌다고 했더니 그분이 거기 등장하는 다른 캐릭터를 집어 그 목소리는 어떠냐고 물었다. “몰라요. 관심 있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이리 아둔한 사람이다. 그 목소리 주인공이 바로 그분이었던 것이다. 곧 사태를 파악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우아, 성우님이 출연하셨던 거예요? 목소리가 완전히 다른데?” 어째 말이 더 꼬이는 느낌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었다. “제 목소리인지 모르는 것이 성우에게는 최고 영광이지요. 다양한 색깔을 가졌다는 뜻이니까요. 고맙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며 재치 있는 말, 배려하는 표현,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한가득 햇살이 밀려오는 대화의 풍경을 그려 보곤 한다. 내 나름대로 선정한 ‘올해의 재치상(賞)’, ‘올해의 배려상’, ‘올해의 훈훈상’ 수상자들에게 마음속 시상식을 갖는다.
얼마 전엔 어떤 책을 구입하려는데 출판사가 문을 닫았는지 절판이었다. 인터넷 중고서점에 주문했다. 다음 날 문자메시지가 왔다. “안녕하세요. 중고책 판매자인데요. 사정상 며칠 후에 발송이 가능할 것 같은데 괜찮으신지요.” 내가 보낸 답장. “괜찮습니다. 21세기 안으로만 도착하면 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썰렁한 아재개그에 ㅋ가 여럿 달린 답장이 도착했다. “ㅋㅋㅋㅋㅋ 알겠습니다. 보내고 연락드릴게요.” ㅋ가 다섯 개면 진짜로 웃은 거라던데. 주책없이 뿌듯해진다.
웃으며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괜히 찡그리며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닐진대 버럭 화를 내는 사람 또한 있다. 다 나름의 감정이 있고 사정이 있겠지만 굳이 왜 그러는가 싶다. 좋은 일, 나쁜 일, 기쁜 일, 슬픈 일, 즐거운 일, 괴로운 일, 희망이 느껴지는 일, 앞날이 걱정되는 일… 숱한 일로 가득했던 한 해가 저문다. 가끔은 ‘하느님은 무신론자인가?’ 싶을 정도로 신의 의도에 고개를 갸웃했던 가슴 아픈 일도 있었지만, 돌아보니 사람의 따뜻함으로 이겨낸 한 해가 아닌가 싶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코미디언은 슬픈 집안에서 나오고 유머 작가는 비극적인 집안에서 나온다”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슬픔과 어려움을 웃음으로 이겨내는 반복을 통해 우리는 단단해진다.
애플망고 젤리만 구입하던 손님이 오늘 오후에 다시 찾아왔다. 이번엔 샤인머스캣을 구입한다. 역시 묻지도 않았는데 말씀하신다. “생각해보니 샤인머스캣도 맛있더라고요.” 아, 그렇군요. “이렇게 하나 배웠습니다”라는 내 흉내에 함께 폭소한다. 올해도 ‘오늘도, 편의점’을 사랑해주신 조선일보 독자 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기쁜 성탄, 복된 새해 맞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