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인데, 어디 놀러 갈 데 없을까.”

마음의 소리가 무심결에 입 밖으로 흘러나올 때가 있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 지명이 날아들었지만, 마음이 동하는 곳이 없었다. “거긴 멀어서 좀 그래. 교통편이 너무 불편해.” “거기는 추운데 괜히 고생할 것 같은데?” “지금 해외를 어떻게 가, 일이 산더미인데….” ‘내가 너무 까탈스럽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훅 들어온 추천 하나. 낮에 따뜻한 곳에서 푸릇푸릇한 나무와 꽃을 보고, 저녁에 괜찮은 공연 하나 보는 건 어떠냐는 말이었다. 게다가 지하철로 갈 수 있는 곳이라고! “거기가 어딘데?”

서울의 새 랜드마크가 된 LG아트센터 서울의 외관.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 연말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뒤로 보이는 타원이 ‘튜브’ 입구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마곡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곳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상전벽해’ ‘천지개벽’ 등의 말로 이곳을 설명한다. 그도 그럴 것이, 10여 년 전만 해도 허허벌판이었기 때문. 내게도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 공항 가는 길, 버스 창문 밖의 끝없는 논밭…. 삼(麻·마)이 많이 나는 동네여서 ‘마곡(麻谷)’이라 불렸던 이곳은 2022년 말 현재 강남 못지않게 화려하고 세련된 곳이 됐다.

마곡은 서울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대규모 개발이 이뤄진 곳이다. 미국 실리콘밸리를 벤치마킹해 첨단산업단지를 조성했다. 2009년 첫 삽을 뜬 뒤 대기업 연구·개발(R&D)센터들이 속속 세워지면서, 젊은 인구가 많이 유입됐고 상업 시설도 줄줄이 들어섰다. 지난 10월에는 서울의 새 랜드마크를 표방하는 ‘LG아트센터 서울’이 문을 열었다. 여전히 변화 중인, 따끈따끈한 ‘신상’ 여행지 마곡은 큰 결심을 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한겨울에 떠난다, 열대 정글 속으로

추운 건 너무 싫지만, 여행은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서울식물원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 2019년 5월 개원한 서울식물원은 국내 최초의 보타닉 공원(공원 속 식물원)이다. 서울식물원의 전체 면적은 50만4000㎡로 여의도공원의 두 배가 넘는다. 주제원(여덟 개의 정원과 온실), 열린숲(잔디마당), 호수원(수변가로), 습지원(식물원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구성돼 있다.

서울식물원에서는 한겨울에도 열대와 지중성 기후에 사는 식물들을 만날 수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백미는 온실이다. 가운데가 오목한 접시 모양인데, 이런 형태의 온실은 세계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높은 가장자리 둘레를 따라 키 큰 식물들이 전시돼 있는데, 식물과 함께 창문 너머 풍경까지 입체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열대관에 들어서자마자 더운 공기가 훅 밀려왔다. 두꺼운 외투를 벗어 손에 들고 나무와 꽃 사이를 거닐다 보니 바깥의 겨울은 금세 잊혔다. 자카르타, 하노이, 상파울루, 보고타 등 열대 기후에 속한 도시 4곳의 식물이 전시돼 있는 이곳은 실제 정글 같은 모습이었다. 부처가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웅장한 인도보리수, 세상에서 가장 큰 잎을 가진 아마존빅토리아수련, 잎이 코끼리 귀를 닮은 콜로카시아기간테아 등 처음 보는 식물이 많았다.

서울식물원 지중해관에선 어린왕자와 바오바브나무를 만날 수 있다. 소풍 온 어린이들이 바오바브나무를 살펴보는 모습.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지중해관으로 들어서니 날씨가 한 번 더 바뀌었다. 바르셀로나, 로마, 퍼스 등 연중 온화한 도시 8곳의 식물들이 있는 이곳은 아기자기했다. 수령이 최장 7000년에 이르러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용혈수, 은빛 녹색 잎이 살랑거리는 지중해의 상징 올리브나무 등 다양한 식물들 사이에서 시선을 잡아끈 것은 거대한 바오밥나무였다. 식물원에 소풍을 온 어린이들은 “우와, 어린 왕자에 나왔던 나무다”라며 신기해했다. ‘어린 왕자’에서 바오바브나무는 두려움의 존재로 그려지지만, 실제는 ‘생명의 나무’다. 굵은 몸통 속에 물을 3톤 이상 머금을 수 있어 건기에 사람들에게 물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뿌리처럼 얽힌 가지의 모습 때문에 신이 실수로 나무를 뒤집어 심었다는 전설도 있다.

서울식물원 온실 내 스카이워크에서는 키큰 열대 나무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지중해관을 다 둘러보고 식물의 체관 같은 좁은 통로를 거쳐 높이 8m의 스카이워크로 올라갔다. 온실의 전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키 큰 나무들에 맺힌 작은 바나나 송이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온실에서 나오면 씨앗도서관이 보인다. 씨앗 500여 종이 전시된 이곳에서는 책처럼 씨앗을 대출할 수 있다. 씨앗을 대출해 재배한 뒤, 수확한 씨앗을 반납하는 시스템이지만 씨앗 반납이 의무는 아니다. 가장 쉽게 기를 수 있다는 바질 씨앗을 대출받았다.

서울식물원 씨앗도서관의 모습. 바질·유채·베르가모트 등의 씨앗을 대출할 수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진 서울식물원 내 야외 정원의 모습.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요즘 뜨는 ‘마리단길’서 커피 한잔

뜨는 지역에 으레 붙는 별칭 ‘○리단길’이 마곡에 없을 리 없었다. 지하철 5호선 마곡역부터 발산역까지 약 800m 골목에 젊은 감성의 카페와 식당이 밀집해있는데, 젊은이들은 이곳을 ‘마리단길’로 부른다.

마곡동 카페거리 '마리단길'의 터줏대감 카페 우드진에서는 캠핑장 분위기로 꾸며진 야외 테라스석에서 호주식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마리단길 중간쯤 위치한 ‘카페 우드진’은 2018년 문을 열어 이곳의 터줏대감으로 불린다. 붉은 벽돌 외관과 나무와 데님을 활용한 인테리어가 편안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곳에서는 호주에서 커피를 배워 온 바리스타가 개발한 호주식 커피를 맛볼 수 있다. 부드러운 라테 위에 커피 향 크림을 올린 우디슈페너, 카카오 파우더를 뿌려 풍부한 풍미가 느껴지는 오지(Aussie)카푸치노가 대표 메뉴다. 우드진에서는 캠핑장 분위기로 꾸며진 야외 테라스에서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캠핑 의자에 몸을 기대 커피를 마시면서, 풍경을 감상하고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멀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즐길거리가 있다. 네모난 빌딩들이 그득한 마곡에 자리잡은 유연한 곡선의 나지막한 건축물, 미술관 스페이스K다. 2020년 문을 연 이곳은 코오롱그룹이 인근에 신사옥을 세우며 서울시에 기부 채납한 서울 서남권 최초의 공공 미술관이다. 언뜻 보면 공원 언덕인지 미술관인지 헷갈릴 만큼 건물이 야트막하다. 스페이스K가 자리한 한다리 공원에는 정해진 입구가 없는 게 특징이다. 어디에서 들어서도 공원을 거닐다 자연스럽게 미술관을 만나게 된다. 미술관이 대지 위에 우뚝 솟은 게 아니라, 공원의 일부로 자연스레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서울 마곡동에 자리한 공공미술관 '스페이스K'의 전경. /신경섭·스페이스K
스페이스K에서 전시 중인 제여란 작가의 작품 ‘Usquam Nusquam’. /스페이스K

스페이스K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조민석 건축가가 설계했다. 공원에서 미술관 옥상으로 향하는 타원형 아치 안에는 계단이 숨겨져 있다. 이곳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지난 3월 이곳에서 열린 미국 작가 헤르난 바스 개인전에 방탄소년단의 RM이 다녀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추상화가 제여란의 개인전 ‘로드 투 퍼플(Road to Purple)’이 열리고 있다. 가로 길이 5m의 대형 캔버스에 다양한 보라색 톤을 실험한 신작 등 회화 50여 점을 선보인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탐구해 온 색의 흐름이 담겼다. 전시는 내년 1월 19일까지.

◇안도 다다오의 역작 속에서 즐기는 수준급 공연

LG아트센터 서울의 또 다른 포토존 ‘스텝아트리움’의 모습. 천장에 꽃 모양 조형물 ‘메도우’가 설치돼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다목적 공연장 LG아트센터는 세계적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다. 안도는 이곳을 ‘여기, 이곳밖에 없는 공연장’이라고 표현했다. 들어서자마자 그의 시그니처인 노출 콘크리트가 시선을 잡아끈다. 건물을 대각선으로 관통하는 기울어진 타원형 통로인 ‘튜브’, 로비에서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곡선 벽면 ‘게이트 아크’, 지하철 마곡나루역부터 지상 3층까지를 연결하는 100m 길이 계단 ‘스텝아트리움’ 등은 대표적인 포토존이다.

이 세 곳을 포함해 총 8곳에 QR코드가 새겨진 안내판이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QR코드를 찍으면 오디오 가이드를 들을 수 있다. “여러분은 지금 LG아트센터 서울을 관통하는 80m 길이의 터널, 튜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중략) 지구와는 또 다른 중력의 공간에 들어선 것 같은 독특한 느낌을 줍니다.” 이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수리남’에 출연한 배우 박해수다. 스텝아트리움에서는 꽃 스무 송이가 리듬감 있게 피어나는 듯한 조형물 ‘메도우’를, 튜브에서는 도넛 모양의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포그 캐논’을, 아트센터 북측 입구에서는 지구 자전축 23.5도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미디어 아트 ‘ARK 23.5′를 볼 수 있다.

LG아트센터 서울의 메인 스팟 '튜브' 내부의 모습. 천장에 설치된 브리지에는 도넛 모양의 연기가 나오는 ‘포그 캐넌’이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시각적 즐거움을 한참 만끽하다가 불현듯 ‘이 고급스러운 향은 뭐지?’란 생각이 들었다. 건물 공조 시스템을 통해 발향되는 이 향기의 이름은 ‘136′. 주변을 묵직하게 감싸는 나무의 향과 생강·정향의 따뜻한 향에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살짝 가미돼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이 독특한 향은 공연장을 찾는 관객에게 특별한 기억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2층에 있는 카페 타이프(TYPE)에서는 커피를 마시며 물감으로 칠한 듯한 하늘과 공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LG아트센터는 세계적 수준의 공연을 다채롭게 무대에 올리는 곳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지휘자로 꼽히는 사이먼 래틀이 이끄는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개관 공연을 시작으로 재즈기타의 전설 알 디 메올라와 가수 박정현, 팝밴드 이날치, 일루셔니스트 이은결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성황리에 펼쳐졌다.

세계적 아크로바터이자 안무가인 요안 부르주아의 대표작 '기울어진 사람들'. 60분 동안 배우들은 회전하는 사각형 판자 위에서 원심력과 중력을 활용해 넘어질 듯 기울어지고, 떨어질 듯 매달려 있다. /LG아트센터
요안 부르주아의 솔로작 ‘오프닝2′ 공연 모습. /LG아트센터

이날 본 공연은 ‘중력을 갖고 노는 안무가’라는 별명을 가진 프랑스 행위 예술가 요안 부르주아의 ‘기울어진 사람들’. 1335석의 홀이 순식간에 찼다. 빠르게 움직이는 정사각형 턴테이블 모양의 판자 위에서 아슬아슬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 다섯 명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다 보니 60분이 금세 지나갔다. 요안 부르주아의 솔로작 ‘오프닝2′가 이어졌다. 계단을 오르다 추락한 뒤, 트램펄린 반동으로 다시 계단으로 올라서는 행위를 반복하는 이 공연은 그의 대표적 퍼포먼스.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이 공연을 담은 영상이 급속도로 퍼졌고, ‘우리의 인생을 보여준다’는 반응을 얻으며 화제가 됐다. 15~18일에는 영국의 유명 극작가 덩컨 맥밀런의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이, 21일부터 2월까지 안중근의 마지막 1년을 다룬 뮤지컬 ‘영웅’이 무대에 오른다.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보타닉파크 호텔 고층 객실에서 LG아트센터 서울 뷰를 감상하며 마시는 와인 한 잔.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공연이 끝난 뒤 ‘호캉스’를 즐기고 싶다면, 바로 옆에 있는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보타닉파크 호텔도 괜찮다. 고층 객실에선 반짝거리는 마곡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AI 배달 로봇 ‘코봇’을 체험해보는 것도 추천한다. 간단한 스낵을 주문하면 안드로이드 마스코트를 닮은 코봇이 직접 객실로 배달해준다.

◇점심은 뜨끈한 털래기 수제비, 저녁은 루프톱 레스토랑?

서울 마곡나루역 인근 봉이밥의 대표 메뉴 ‘시래기 털래기’.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도시에서 ‘찐맛집’을 찾으려면 그 동네 직장인들에게 물어야 한다. 마곡에서 근무하는 회사원들에게 물었더니, 점심 때 인기가 높은 식당 두 곳을 추천했다. 마곡나루역 인근 봉이밥은 시래기 털래기(2인 2만원)가 인기 메뉴다. 털래기는 온갖 재료를 한데 모아 털어 넣는다는 뜻. 시래기와 갖은 채소를 넣고 끓인 된장 수제비다. 뜨끈한 국물이 바깥의 추위를 잊게 한다. 색색깔의 나물이 올려진 보리밥(8500원)을 곁들이는 것도 좋다.

마곡역 인근 하양옥은 대기가 필수지만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식당이다. 점심에는 솥밥정식 메뉴를 시킬 수 있는데, 완도전복·통영굴·미나리명란·송화버섯 등을 솥밥의 토핑으로 고를 수 있다. 솥뚜껑에 우삼겹을 구운 뒤, 그 솥뚜껑에다 된장찌개를 끓여준다. 된장이 다 끓을 때쯤 김이 폴폴 나는 솥밥이 등장한다. 완도전복 솥밥 정식은 1만6000원, 송화버섯 솥밥 정식은 1만3000원이다. 저녁에는 얼큰한 빨간 국물의 수육전골(2인 3만원)이 인기다.

서울 마곡나루역 인근의 미국 캘리포니아 스타일 비스트로 라셰즈에서는 버거와 파스타, 스테이크 등을 즐길 수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저녁을 럭셔리한 분위기에서 즐기고 싶다면 미국 캘리포니아 스타일 비스트로 라셰즈를 추천한다. 메이필드 호텔이 운영하는 라셰즈는 팜투테이블 방식으로 신선한 제철 재료를 공수한다. 구운 수제 와규 패티에 고급 치즈를 넣어 만든 그릴 와규 쇼츠 립 버거(2만1000원), 양고기의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는 화이트 램 라구 파파델레(2만4000원)가 인기가 많다. 해질 무렵 이곳을 찾는다면 루프톱 테라스에서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다.

마곡나루역 인근 마나식당은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 느낌의 작은 요리주점이다. 작고 편안한 분위기지만, 나오는 안주들은 고급스럽다. 1인당 5만원의 ‘오늘의 요리’ 코스 메뉴를 시키면 제철 식재료를 사용한 특색 있는 음식들이 나온다. 굴미역 리조또, 우삼겹 배추찜, 바지락 파스타, 부채살 스테이크와 감자퓨레 등이다. 메뉴는 때마다 조금씩 변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