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살만도 빈곤 포르노?’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국내 주요 재벌 총수들의 면담 사진 게시물에 이런 제목이 붙었다. 사진에는 빈 살만 왕세자를 비롯해 참석자들 머리 위에 각자의 재산 규모로 추정되는 숫자가 표시돼 있다. 우리 돈으로 2700조원을 보유한 빈 살만의 재력이 워낙 막강해 의도치 않게 국내 총수들의 재산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였다. 사진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13조,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 그룹 회장은 각각 3조로 표시됐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 총수들의 재산이 결코 적은 게 아닌데 요즘 정치권에서 ‘빈곤 포르노’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다 보니 이런 풍자까지 나온 것 같다”고 했다.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는 원래 자선구호 단체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자극적으로 묘사해 더 많은 기부금을 이끌어내려는 관행을 비판할 때 쓰는 용어다. 그런데 최근 국내에선 윤석열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에 동행한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의 어린이 심장병 환자를 품에 안고 있는 사진이 공개된 이후 정쟁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김 여사 사진을 두고 “빈곤 포르노 화보 촬영을 했다”고 비판한 데 이어 당시 촬영을 위해 조명까지 썼다고 주장하며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 대통령실이 장 의원을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경찰에 고발하면서 윤 정부 출범 후 첫 법정 소송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정쟁 도구로 변질된 ‘빈곤 포르노’
국민의힘은 장경태 의원의 ‘빈곤 포르노’ 주장에 “인격 모독이자 반여성적 발언”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성인 음란물을 뜻하는 단어인 ‘포르노그라피’를 의도적으로 정치 공격에 이용해 김 여사를 모욕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장 의원은 “빈곤 포르노는 사전이나 논문에도 나오는 정식 학술 용어”라며 맞섰다.
하지만 정치권 안팎에선 “취약 계층 아동의 문제를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빈곤 포르노’라는 용어가 사전적으로 맞는 표현일지라도 정치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정치인들이 가난한 사람을 찾으면 다 빈곤 포르노인가. 굉장히 부적절한 낱말 사용”이라고 지적했다. 진 교수는 “일부 여성혐오 여론에 민주당이 편승해 부정적 이미지를 김 여사에게 씌우고 그 여파가 대통령에게 미치는 것을 노린 전략”이라고 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학)는 “야당 의원이 대통령 해외 순방에서 있었던 김건희 여사 사진 촬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포르노’ 같은 과격한 표현을 쓰는 등 품위 있게 비판하지 못한 건 문제”라고 말했다. 한 정치 평론가는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와 사진 촬영을 한 게 모두 빈곤 포르노라면 과거 아프리카 빈곤 아동 구호에 나섰던 배우 김혜자나 앤젤리나 졸리도 빈곤 포르노 화보 촬영을 한 것이 된다”고 했다.
아동계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국제 구호단체 한 전직 임원은 “논란이 된 캄보디아 사진은 야당이 주장하는 식의 ‘빈곤 포르노’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정치권에서 지나치게 사안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대통령실에서 사전에 윤리적 논란이 뒤따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했어야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사회복지 전문가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동의 뒷모습을 찍는 등 신원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게 요즘 관례인데 그렇지 못했다”고 했다. 한 구호단체 관계자는 “배우 오드리 헵번은 현지 어린이들과 오랜 시간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삶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국제 봉사 경력이 없다시피 한 김 여사는 사진에서 먼 곳을 응시하는 등 어색한 모습이 보여 일회성 쇼에 가까웠다”고 했다.
자선 단체의 딜레마
‘빈곤 포르노’라는 용어는 1981년 덴마크 비영리단체인 단처치에이드에서 ‘빈곤을 파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쓴 성명에서 처음 사용됐다. 당시 유니세프, 월드비전 등 많은 글로벌 구호단체들이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는 캠페인을 경쟁적으로 추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아이들이 흙바닥에 힘없이 누워 있거나 파리 떼가 온몸에 붙어 있는 모습을 여과 없이 모금 광고에 쓴 것을 비판했다.
문제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국내외 적지 않은 자선단체들이 이런 식의 모금 행위를 하면서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모금 효과가 여전히 크기 때문이다. 집에 생수가 충분히 구비된 아프리카 어린이에게 썩은 물을 마시게 하거나 맑은 물에 돌을 던져 더러운 흙탕물처럼 보이는 조작은 기본.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선 구호단체 광고에 출연하는 모금 방송 전문 아역 배우도 있다. 한 자선단체 간사는 “국내에서도 결손 가정 후원 영상을 촬영할 때 ‘최대한 허름한 옷을 입을 것’이라고 주문한다”며 “인위적 모금 광고의 폐해를 잘 알지만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해야 모금 효과가 좋기 때문에 그런 사진들을 노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했다.
한 구호단체 관계자는 “2018년 영국 팝가수 에드 시런이 자선단체와 함께 라이베리아를 찾아 현지 빈곤 아동을 만나는 영상을 제작했는데 빈곤 포르노라는 비판을 거세게 받아 이 가수가 등장한 영상을 삭제했다”면서, “아이들의 고통과 배고픔을 이미지화하면 당장의 모금 활동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반복 재생될 경우 편견과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빈곤층 개선된 모습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
전문가들은 “무작정 어려운 형편을 부각하기보다 기부를 통해 그들의 삶이 어떻게 개선되는지를 보여주는 게 더 많은 기부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일부 자선 단체에선 최근의 흐름을 반영해 모금 방식에 변화를 주고 있다. 굿네이버스는 ‘저소득가정 여아지원사업’을 진행하면서 캠페인 영상에 ‘지난 2년 동안 5600여 명의 소녀에게 (반짝반짝 선물 상자가) 전달되었습니다’라는 문구를 강조했다. 아동이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알리기보다 어떤 도움을 받아서 삶이 개선됐는지 알리고 있는 것. 이 단체는 2017년부터 매년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4㎞ 코스를 걷는 ‘희망 걷기 대회’를 열고 있다.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매일 4시간 동안 걷는 개발도상국 어린이들의 고충을 이해하기 위한 취지다.
자선단체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기부자들이 낸 돈이 투명하게 집행돼야 이후에도 추가 기부를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 법 개정으로 모든 기부자선 단체는 기부금 집행 내역을 의무적으로 공시하고 있지만, 1년 기부금 20억원 이하 단체의 경우 외부 감사를 받지 않아도 된다. 국내 자선단체의 기부 내역을 공개해온 한국가이드스타의 권오용 상임이사는 “윤미향 사건 이후 자선단체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정기 기부를 끊은 사람들이 많았다”며 “내가 낸 기부금이 올바로 쓰이고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빈곤 포르노 같은 자극적 광고 없이도 충분한 기부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