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2일. 영국 맨체스터 아레나에서는 세계적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의 투어 콘서트가 열렸다. 콘서트가 끝나고 관객들이 공연장을 빠져나갈 때 두 차례 큰 폭음이 울렸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심취한 20대 청년이 사제 못 폭탄을 터트린 것. 자살 폭탄 테러에 공연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관객들은 소리를 지르며 공연장 밖으로 도망쳤다.

이 테러로 관객 22명이 죽고 최소 800명이 다쳤다. 테러를 코앞에서 목격한 아리아나 그란데도 크게 충격받고 곧장 미국으로 돌아갔다. 테러 발생 5일 뒤 그란데는 트위터에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움츠러들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고 공포에 떨지도 않을 겁니다.”

테러가 발생한 지 정확히 2주 뒤인 6월 4일 맨체스터 올드 트레퍼드 경기장에 마련된 콘서트 무대에 그란데와 2만여 관객이 다시 모였다. 콘서트 제목은 ‘원 러브 맨체스터’. 그란데가 테러 희생자를 추도하고 수익금으로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고자 단 2주 만에 자선 콘서트를 마련한 것이다. 테러의 공포가 채 가시지 않았음에도 콘서트 티켓은 20분 만에 매진됐다.

수수한 옷차림으로 무대에 선 그란데는 울거나 구슬픈 노래만 부르지 않았다. 희생자들이 생전에 즐겨 듣던 자신의 댄스곡에 맞춰 흥겨운 춤과 노래도 선보였다. 마지막 곡인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를 부를 땐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고, 그와 관객들은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외쳤다.

2022년 10월 29일 대한민국 서울 이태원에서 핼러윈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여든 청년 156명이 압사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오늘로 참사가 발생한 지 2주가 지났지만, 대한민국에는 ‘사랑’과 ‘용기’ 대신 ‘멈춤’과 ‘비통’만 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국민을 통합하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길거리 응원도 ‘애도’ 차원에서 20년 만에 사라지게 됐다. 공연과 축제가 줄줄이 취소되고, 각종 행사가 사라지자 공연 업계와 요식 업계는 “생업이 죄”라는 말까지 나온다. 학계와 평론가들은 “‘멈춤’과 ‘슬픔’만을 강요하는 과도한 엄숙주의가 다양한 추도 방식을 가로막고 사회적 성숙을 가로막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 2017년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가 영국 맨체스터에서 폭탄 테러 희생자를 추도하는 콘서트를 열었다. /유튜브 캡처

◇'국민 정서’와 참사 공포에 무너진 거리 응원

지난 4일 대한축구협회는 “이번 카타르 월드컵 기간에는 광화문 광장 등에서 거리 응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축협은 “참사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거리 응원은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며 “유가족, 그리고 아픔을 겪고 있는 많은 분께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최종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축협이 광화문광장 거리 응원을 취소하자 현대자동차가 주최해온 서울 영동대로 거리 응원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지자체들이 준비했던 거리 응원도 줄줄이 취소됐다. 이들 모두 취소 사유로 ‘국민 정서’를 들었다. 거리 응원이 이태원 참사를 애도하는 국민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발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각종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이태원 참사 때는 ‘거리에 나간 것이 잘못이 아니다’ 하더니, 거리 응원은 잘못인가?” “국가 애도 기간이 끝나고 한참 뒤에 열리는 월드컵인데, 언제까지 슬퍼해야 하는가” 하는 말들이 나왔다.

김헌식 대중문화 평론가는 “거리 응원은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원치 않으면 가지 않게 자율적으로 두면 되는데 언젠가부터 참사나 재난 후에 특정한 행동과 감정을 갖는 것이 의식 있고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고 했다. 또 다른 평론가는 “‘애도’를 이유로 거리 응원을 취소해버리니 거리 응원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마치 의식이 없고 개념이 없는 사람처럼 굳어버리는 분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한 사회학자는 “축협과 기업, 정부·지자체가 엄숙주의와 이태원 참사의 공포 앞에서 무너진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거리 응원 중에 혹시나 압사가 발생하거나 자잘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벌어질 책임 공방과 논란을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 아니겠느냐”며 “민관이 협조해서 철저한 안전 대책과 사전 준비로 거리 응원을 성공적으로 치러낸다면 이태원 참사를 국민적으로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는데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축협의 행보는 지난 9월 8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했을 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가 보인 대처와 대조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여왕이 서거하자 EPL 측은 애도 차원에서 10~12일에 예정된 경기를 모두 중단·연기했지만, 이후 경기는 여왕을 추모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선수와 심판 모두 검은색 완장을 차고 킥오프 전 국가 연주와 1분 묵념을 했다. 경기 시작 70분이 지난 후반 25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70년 재임 업적에 경의를 표하는 차원에서 관객들이 1분간 기립해 손뼉을 치는 추모 의식도 있었다.

여왕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EPL을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작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 축구계 인사들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이 지켜보는 EPL 경기에서 검은 완장을 차고 묵념하고, 국가를 부르고 왕실 밴드가 연주하는 것이 더 나은 추모”라고 반박했다.

지난달 31일 서울 롯데월드에 이태원 참사를 애도하는 차원에서 공연과 이벤트가 취소됐다는 안내문이 붙었다/뉴시스

◇”모임도, 공연도 하지 마라” 애도에 막힌 생업

학계와 평론가들은 “애도를 이유로 예정된 축제나 공연, 모임이나 행사 등을 마구잡이로 취소하는 게 더 문제”라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 직후 서울시는 강남구, 용산구, 영등포구에 있는 음식점에 ‘사고 예방과 사망자 애도 등을 위해 자발적으로 영업을 중단하거나 특별 행사는 자제해달라’는 권고 공문을 보내 논란이 일었다. 서울시 측은 “‘강제’가 아닌 ‘권고’였고 희생자 애도 분위기를 전달하는 차원이었다”고 해명했지만, 공문을 받은 자영업자들은 “휴업하면 나라에서 영업 손실을 보상해줄 건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지인데 너무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참사 이후 기업·공공기관이 줄줄이 연말 행사와 회의, 회식까지 취소하는 것도 자영업자들에겐 타격이다. 업자들 사이에선 “이제 좀 코로나를 벗어나나 했는데 올해도 연말 특수는 없는 것 같다”는 한탄이 이어진다. 한 자영업자는 “왜 애도를 하는데 일상을 멈춰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공연·예술계도 말 못 할 고충에 빠졌다. 이태원 참사로 핼러윈 데이 관련 축제가 몽땅 취소된 데다 연말까지 예정됐던 지역 축제, 공연도 줄줄이 취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상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김헌식 평론가는 “코로나 사태 3년을 겪고 다시 투자해서 공연하려던 사람들이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실정”이라며 “다양한 애도 방식이 인정되지 않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작곡가 래피는 자신의 SNS에 “왜 유독 공연 예술가들만 일상을 멈추고 애도를 해야 할까. 공연 예술가는 최소한 생계라도 이어가며 애도하면 안 될까”라고 썼다. 싱어송라이터인 ‘생각의 여름’은 “공연이 업인 이들에게는 공연하기도 애도 방식일 수 있다”며 “예나 지금이나 국가기관이 보기에는 예술이 유흥, 여흥의 동의어인가 보다”라고 했다.

하재근 문화 평론가는 “추도 감정·방식을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도리어 여러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각자 생업이 있고 그에 맞는 삶을 영위하는 것인데 이를 윤리적으로 단죄하고 대중적·집단적으로 공격하는 분위기가 우려스럽다”고 했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철학 전문위원은 “추도에 대한 사회적 정서를 성숙하게 형성하는 것이 정치가 해야 할 일인데, 정작 정치권은 참사를 정치화해 분노와 슬픔의 감정을 선동하기 바쁘다”며, “이태원 참사를 진정으로 극복하는 건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와 축제를 사고 없이 잘 치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김헌식 평론가는 “참사가 반복되지 않을 시스템을 만들고, 거기에 적응해가는 게 진정한 극복이자 사회적 성숙”이라며 “지금처럼 하지 말라, 모이지 말라고 하면 언제 그런 기회를 가질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배준용 주말뉴스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