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2시간에 한 번 오고, 편의점은 9시에 문 닫고, 서점도 치과도 없지만 술집은 또 두 개나 있는데, 그러면서도 카페 하나 없어서 자판기 캔커피를 뽑아 벤치에서 마시는 수밖에 없는 산골 깊은 마을 이토모리. 좁디 좁은 곳에서 사람들은 또 왜들 그렇게 수군거리고 뒷말들을 하는지, 무녀 가문의 장손녀로 신사(神社) 일을 돕는 고등학생 ‘미츠하’는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 도쿄로 가고 싶다.

일러스트=유현호

소원이 간절했던 걸까. 일주일에 두세번씩 이상한 일을 겪는다. 깊게 잠들고 나면 도쿄의 아파트에서 눈을 뜨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내 몸이 아니라는 것. ‘타키’라는 남자 고등학생 몸에 들어간다. 더 큰 문제는 내가 타키의 몸에 들어갈 때, 타키라는 놈 역시 내 몸에 들어와 버린다는 것. 도시 소년과 산골 소녀는 서로 뒤바뀐 몸을 지닌 채 휴대폰과 노트, 심지어 자신의 얼굴에 남긴 낙서 따위를 통해 서로를 알아간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내 몸을 차지하고 있는 너는 누구야? 너의 이름은 뭐지?

<너의 이름은>. 일본의 젊은 애니메이션 거장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2016년 작품이다. 영화는 마치 엉뚱하고 발랄한 청춘 판타지 로맨스인 것처럼 출발한다. 하지만 신카이 감독이 하고자 한 진짜 이야기는 따로 있다. 서로 몸이 바뀐 채 평행우주를 살아가는 두 남녀의 러브 코미디를 통해,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일본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양한 SF 작품 등에서 소재로 활용된 탓에, 평행 우주(Parallel Universe)는 진지한 학술적 논의가 아닌 것처럼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다중 우주론과 그에 따른 평행 우주는 양자역학의 초기 단계부터 이론적 가능성으로 거론되어 왔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모든 것은 확률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관찰할 때 특정한 방향이나 상태로 결정된다. 그러니 이 우주는 관찰자의 수만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젊은 연구자 휴 에버렛 3세가 내린 결론이었다.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였던 닐스 보어를 비롯해 대다수의 사람은 그런 관점을 수용하지 않았다. 상대성 이론을 앞세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던 아인슈타인과 싸우고 있던 당시 양자물리학자들에게, 다중 세계와 평행 우주론은 가뜩이나 좁은 양자역학의 입지를 더욱 취약하게 만드는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보였을 것이다. 지금도 다중 우주론은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확인되지 않은 가설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철학은 과학 너머를 탐구하는 학문. 철학자들은 근대 초기부터 다중 우주론과 유사한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미분을 발견한 수학자로도 잘 알려진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가능 세계(Possible Universe)의 관점을 제시했다. 라이프니츠가 볼 때 세계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계는 그 많은 가능성 중 실현된 단 하나에 불과하다. 평행 우주론의 그것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논의다.

물론 철학과 과학의 사유가 동일하지는 않다. 라이프니츠는 17-18세기를 살았고 두터운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모든 가능 세계 중 최선의 것이어야 한다고 라이프니츠는 생각했다. 왜일까? 우리를 사랑하는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은 우리가 최선의 세계에 살도록 모든 것을 미리 정해놓았다. 이른바 예정조화설(豫定調和說)이다. 이 낙관적인 세계관은 1755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축제와 함께 미사가 거행되고 있던 9시 40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전대미문의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허물어졌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를 쓴 볼테르는 팡글로스 박사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라이프니츠를 조롱했다. 이 끔찍한 모습이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이라고? 그런 소리를 할 시간에 깔린 사람들을 꺼내고, 불을 끄고, 텃밭이라도 일구는 게 어때?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지난 10월 29일, 사람이 많으면 파도가 되고, 인파에 휩쓸려 156명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압사 사고가 전에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대형 참사는 만원 지하철과 버스에 부대끼며 살아온 대부분의 한국인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모두가 행복하고 즐겁기 위해 거리에 나왔을 뿐인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가 아닐 거라고,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 그 일을 막았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가슴을 치며 울게 된다.

<너의 이름은>은 그런 이야기다. 1200년 주기로 돌아다니는 혜성이 지구에 아주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중력의 영향으로 혜성이 쪼개지고 파편들이 쏟아지는 우주쇼. 그런데 타키는 그 일을 ‘과거’의 사건으로 기억하는 반면, 미츠하에게는 두 달 후 ‘미래’에 벌어질 일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간대의 평행우주를 살고 있는 것이다. 혜성이 떨어질 장소는 미츠하가 살고 있는 바로 그 마을이다.

과거의 여자와 미래의 남자는 애틋한 마음만 남긴 채 상대방의 이름조차 잊고 만다. 하지만 타키는 이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과거의 미츠하, 다른 우주의 미츠하를 살리기 위해, 무작정 배낭을 메고 이토모리로 향해, 기억나지 않는 너를 향해 달려간다. 타키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질 수도 없는 미츠하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 녀석을, 그 녀석을 만나기 위해 왔어. 구하기 위해 왔어. 살아 있었으면 했어.” 동일본 대지진의 아픈 기억을 떨쳐내고 서로를 위로하며 미래로 나가자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메시지인 것이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벌어지지 않았어야 할 일이 벌어졌다. 구할 수 있었던 목숨을 구하지 못했다. 사망자들의 우주는 닫혔고, 부상자들의 세계는 찌그러졌으며, 유가족들에게는 가장 슬픈 현실만이 남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은 가능한 최선의 세계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보았다. 미츠하에게 달려가는 타키처럼, 육체적·정신적 트라우마를 무릅쓰고 구조를 요청하고 CPR을 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애쓰던 시민들. 목이 터져라 현장을 수습하고 구급차를 몰던 일선 경찰과 소방관들. 그 무수한 헌신과 희생에 힘입어 우리는 가능한 최악의 세계를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