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수학 실력이 딸려 골머리를 앓았다. 부모님께서 논리적 사고를 담당하는 막내아들의 좌측 뇌를 부실하게 만드셨나? 못난 놈이 조상 탓 한다지만 어쨌거나 수학에는 영 소질이 없었고 시험 점수도 늘 기대에 못 미쳤다.

일러스트=한상엽

대학 입시 때도 가장 큰 걸림돌이 수학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공통 수학’을 끝내고 2학년 올라가면서 이과(理科)에서는 ‘수학 1′을 거쳐서 ‘수학 2′를 배웠다. 벡터, 삼각함수, 통계 수업까지는 힘에 부쳐도 그럭저럭 끌려갔다. 마지막 단계인 미적분에 이르렀다.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용량 초과(?)로 과부하가 걸리는지 머리에서 삐걱거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시험 때마다 다른 과목에서 힘겹게 얻은 점수를 수학에서 족족 까먹었다. 언감생심 잘하는 건 고사하고 웬만큼만이라도 했으면 하는 자책에 속이 상했다. 학원 등록도 하고 어머니를 졸라 과외 공부까지 했어도 기대만큼 소득이 없었다. 자신감을 잃었고, 담임 선생님한테 이런 성적으로 대학이나 갈 수 있겠냐는 호된 질책을 받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못된 녀석이 골치 아픈 미적분을 만들어 골탕을 먹이는 거야?”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푸념의 궁금증이 곧 풀렸다. ‘못된 녀석’의 정체가 수학이 아닌 물리 수업에서 밝혀진 것이다. 17세기 영국의 ‘아이작 뉴턴’이 자신의 물리 연구를 위한 수단으로 미적분을 고안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뉴턴은 학생을 위한 위인전의 단골이다. 풀밭에 앉아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알아낸 낭만적인 멋쟁이 과학자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미적분 창시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친밀감을 가졌던 뉴턴에게 배신감이라고 할까, 아무튼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평범한 현상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천재라는 경외심과, 미적분을 만들어 어린 학생을 괴롭히는(?) 장본인이라는 원망이 교차했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이 되면서 최종 진로를 결정했다. 주저 없이 의대를 선택했다. 어려서부터 줄곧 의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있는 데다 의대 공부는 수학이 덜 중요할 것 같았다. 당시는 산업화 시대에 걸맞게 공과대학 지원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시절이었다.

그해 양력 1월의 대학교 입시 날도 어김없이 유별나게 추웠다. 그렇지 않아도 떨리는 마음이 몸과 함께 얼어붙었다. 이틀간의 본고사에서 수학 시험은 둘째 날 첫 시간이었다. 평소에도 빈틈이 없으신 아버지께서 일찌감치 고사장에 데려다주셨다. 시작까지 여유가 있어서 갖고 간 예상 문제집을 이리저리 뒤적였다. 어느 정리(定理)를 증명하는 문제에 왠지 모르게 ‘필’이 꽂혀서 유심히 봤다.

시험지가 배부되고 종소리와 함께 책상에 엎어 두었던 시험지를 뒤집었다. 일곱인가 여덟 문항에 90분이 주어졌다. 마른침을 삼키며 먼저 시험지 전체를 쭉 훑어봤다. 꿈인가 생시인가, 불과 몇 분 전에 눈여겨보았던 문제가 있었다. 웬 떡이냐 하고 후닥닥 답안을 써 내려갔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든 셈이다. 한 문제를 거저 먹고 나니 긴장이 스르르 풀어졌다. 느긋해지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나머지 문제도 술술 풀렸다. 운동선수가 힘을 빼야 한다는 이치와 마찬가지라고 할까. “왜 진작에 자신을 갖지 못했지? 수학이라면 지레 겁먹고 도망가려 했던 마음이 문제였어.” 걱정했던 수학에서 오히려 점수를 벌어 운 좋게 합격 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대학 입학 후에는 징글징글한 미적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다. 예과 때 교양 필수과목인 수학은 큰 부담이 아니었다. 본과 수업 중에도 간혹 수학의 기본 개념이 필요한 정도지 골치 아픈 수학 문제를 직접 대하지 않았다.

임상 의사가 되려는 사람이 왜 입학시험에서 난해한 수학 문제를 풀어야 했을까? 아직도 정확한 답은 모르지만 돌이켜 보니 진단과 치료 과정에서 논리적 사고를 펴는 데 바탕이 됐다는 생각이 든다.

허준이라는 수학자가 ‘필즈 메달’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권위 있는 상인데 한국 출신으로는 처음이란다. 현재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미국인이지만 국내에서 대학을 다니고 석사 학위까지 받았다. 당연한 귀결로 ‘국뽕’이 힘을 받았다. 많은 사람이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교육의 쾌거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려서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문학과 수학은 동떨어진 학문 분야라 듣는 사람은 어리둥절하다. 시인이 되려던 사람이 출중한 수학자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대학에서 전공도 원래는 물리학인데 중간에 수학으로 바꿨다고 한다.

기존 질서에 저항 없이 순응하거나 정해진 틀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잖은 방황을 하면서도 끝내 빛나는 업적의 허 교수를 만든 동력은 무엇일까? 천재성인가, 노력인가, 아니면 인문학에 바탕을 둔 자유로운 사고인가. 스스로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비결을 밝히고 있다.

반세기 전 대학 입시 수학 시험에서 경험한 자신감이 머리를 스친다. 필부(匹夫)의 자신감과 대(大)학자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동일 선상에 놓는 건 얼토당토않은 망발이다. 그래도 매사에 자신을 갖고 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친 중요한 계기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