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엔 덕수궁 돌담길을 혼자 걸어도 외롭지 않겠다. 지난 25일 서울 덕수궁 돌담길엔 나무마다 ‘꽃’이 피었다. 연분홍 벚꽃 뒤엔 노란 해바라기가, 그 뒤에 하얀 은방울꽃이 조로록 달렸다. 서울 중구 자원봉사센터 봉사단 등 100여 명이 넉 달간 털실로 짠 ‘뜨개옷’이다. 낙엽 지는 가을이면 거리마다 뜨개옷 입은 나무를 자주 만난다. 이 날 덕수궁 길을 지나가던 시민 김현희(56)씨는 “아무래도 초겨울 나무를 볼 때면 썰렁한 기분이 드는데, 알록달록하게 옷을 입혀 놓으니 눈과 함께 마음까지 즐거워진다”며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고 했다.
◇쓸쓸한 가로수에 핀 꽃
서울 덕수궁 돌담길부터 정동길 일대 가로수 230여 그루에는 나무마다 사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번 나무 옷 뜨기에 자원한 사람들의 이름이다. 털실 값만 소공동 시민참여 예산으로 사용하고, 제작부터 설치까지는 모두 자원봉사자 100여 명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지난 6월부터 9월까지 주 2회 뜨개질 강사의 수업을 들으며 꽃을 주제로 한 뜨개 작품을 제작했다. 강사 원영숙(59)씨는 “몇 년 전부터 이런 나무 뜨개옷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보다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어 ‘꽃’을 주제로 삼아 작업했다”며 “제작 과정의 주의 사항은 사람 옷 뜨는 것과 똑같다. 사이즈를 잘 재고 무엇보다 마지막에 코가 풀리지 않게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나무 뜨개옷은 조금이라도 사이즈가 크면 흘러내리기 때문에 아예 못 입히는 일이 생긴다. 이 때문에 실측 사이즈보다 1~2cm 작게 뜨는 게 팁. 정동길 나무들도 세로 길이만 평균 90cm로 동일하게 맞추고, 가로는 자원봉사자가 각자 맡은 나무의 크기를 직접 재서 ‘맞춤 옷’을 만들었다. 옷을 입힐 땐 먼저 네모난 옷을 나무에 두른 다음, 마지막 바늘은 현장에서 직접 떠서 마무리한다. 색깔은 빨주노초파남보와 같은 원색 계열을 고루 사용하는 게 주시성(注視性)을 높인다. 솜씨 좋은 이들이 2개 이상씩 만들며 230여 그루 모두에게 옷을 입혔다.
중구청은 “뜨개옷은 겨울철 추위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고, 시민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며 “코로나 19로 위축된 시민들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냈다”고 했다. 정동길 나무 옷은 오는 2월 말까지 입혀 놓았다가, 소각할 예정이다.
◇'거리 예술'로 인정받아
나무 뜨개옷은 미국에선 이미 ‘그래피티 니팅(graffiti knitting)’으로 불리며 하나의 거리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 그 대상도 나무뿐 아니라 신호등, 자전거 거치대, 소화전 등으로 다양하다. 2005년 미국 텍사스주(州) 휴스턴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던 마그다 사예그가 시작한 ‘뜨개질 투하(yarn bombing) 운동’이 대표적이다. 사예그가 동네 차량 정지 표지판에 뜨개옷을 입혔더니, 차가 아닌 사람들이 이를 보려고 멈춰 서기 시작했다. 사예그는 “강철과 콘크리트로 된 주변 환경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며 “매일 바라보는 차가운 회색의 쇠로 된 표면에 따뜻하고 보송보송한 인간적인 것이 덮여 있길 바랐다”고 했다.
◇잠복소 역할은 떨어져
나무 뜨개옷을 보고 과거 나무를 볏짚이나 거적 등으로 감싸 놓던 ‘잠복소’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 잠복소는 따뜻한 곳을 찾는 해충의 특성을 이용해 잠복소로 벌레들을 유인하여 소각하는 일종의 방제법이다. 과거 솔나방과 미국흰불나방이 극성을 부리면서 시작됐으나, 지금은 그 효과가 미미해 산림청에서는 권장하지 않는다. 2020년 11월 국립산림과학원 산림병해충연구과가 잠복소를 분석한 결과, 솔나방·미국흰불나방 등 수목 해충보다 해충의 천적이 더 많이 발견돼 설치 지양을 권고했다.
보온 효과도 그리 높지 않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원관리실 김성실 대리는 “보온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미미한 수준”이라며 “기본적으로 각 지자체에서 심는 가로수들은 해당 지역의 겨울을 잘 날 수 있는 식물들로 식재했다.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은 영하 20도까지는 견딜 수 있다”고 했다. 다만 감나무나 배롱나무 등은 서울 등에서는 겨울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으므로, 뜨개옷 등으로 감싸면 보온 효과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