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 화가 이명기 '송하독서도'.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컬렉션.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내년 1월 29일까지 열리는 고 이건희 회장 기증 특별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에 전시 중이다. /국립광주박물관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논어’ 학이(學而)편

청소년들의 문해력이 떨어지고 있다, 긴 글을 못 읽는다는 개탄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청소년 문해력만 문제일까, 성인들 문해력도 문제겠지. 긴 글 읽기만 어려울까, 짧은 글 읽기도 만만치 않겠지. 작법서는 많아도 독해서는 적고, 외국어 독해서는 많아도 자국어 독해서는 적다. 아마도 성인의 자국어 문해력은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정말 성인의 문해력이 괜찮다면, 남의 말과 글을 곡해하고 비방하는 일이 지금처럼 만연할까.

단 한 문장을 이해하는 일도 쉽지 않다. 내겐 <논어>의 첫 문장,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의 이해조차 쉽지 않게 느껴진다. 얼핏 보기에 어려울 게 없는 평이한 문장이다. 그러나 정말 평이하기만 하다면, <논어>라는 편집서에 굳이 첫 문장으로 등장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문장을 그저 평이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그 문장과 경쟁할 만한 다른 문장들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말은,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슬프지 아니한가?”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지루하지 아니한가” 등등의 문장과 경쟁할 수 있다. 달리 말할 수 있었는데도, 애써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말한 것이다. 공부하는 일이 괴롭고 지루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공부하는 일이야말로 기쁜 일이라고 일부러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지 모른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말은, “케이크를 먹으면 기쁘지 아니한가?” “아이돌 동영상을 보면 기쁘지 아니한가?” “마약을 하면 기쁘지 아니한가?” 등등의 문장과도 경쟁할 수 있다. 마음이 기뻐지려면 맛있는 것을 먹거나, 자극적인 동영상을 보거나, 마약을 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일부러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반문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어떤 문장과 경쟁할 수 있는 다른 문장들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문장을 한층 더 진지하게 대하게 된다.

어떤 문장을 진지하게 대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문장이 답이라면 문제는 무엇인가, 혹은 그 문장이 문제라면 답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이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가 답이라면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아마도 “왜 공부를 해야 하죠?” 혹은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지죠?” 등등일 수 있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가 문제라면 답은 무엇인가? 공부라는 일견 지루해 보이는 일이 어떻게 해서 기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 다시 말해서 배움과 즐거움의 공존 가능성이 답일 수 있다. 어쨌거나. 그 문장이 답이라면 문제는 무엇인가, 혹은 그 문장이 문제라면 답은 무엇인가,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문장의 맥락을 좀 더 잘 구성하게 된다.

생략된 문장 요소를 재구성해볼 수도 있다. 논어 첫 문장에는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지,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말을 공자에게 직접 들은 사람은 목적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생략하곤 하니까. 그러니 아무 말이나 목적어로 올 수는 없다.

무엇을 배우고 익히든 다 즐거울 리는 없지 않은가. 입시 공부가 재밌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고시 공부가 흥미진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고 모든 공부가 다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과연 숨겨진 목적어는 무엇일까. 비어 있는 목적어를 서둘러 채우려 들어서는 안 된다. 아무렇게나 목적어를 집어넣고 그것이 진리인 양 떠들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논어>의 다른 문장들에서 배우고 익히는 일의 목적어로 무엇이 사용되었는지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그렇게 따져보면, 아무거나 “배우고 익히다”라는 동사의 목적어로 사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목적어를 특정할 수 있어야 나름의 근거를 갖고 논어 첫 문장을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파악하는 일이 귀찮다고? 그럴 수 있다. 다만 그럴 경우 자기 의견은 근거 없는 ‘뇌피셜’에 불과하게 된다. ‘뇌피셜’ 이상의 주장을 하려면, 근거를 찾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논어> 안에서 배우고 익히는 일의 목적어가 무엇이었는지 따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 동시대 문헌들에서 어떤 것들이 배우고 익히는 일의 목적어로 사용되었는지 전수 조사를 하려 드는 이들이 있다. 세상에는 별 근거 없이 자기 주장을 앞세우는 사람도 있지만, 심혈을 기울여 주장의 근거를 최대한 수집하려 드는 사람도 어딘가에는 존재한다.

어쩌면 <논어> 첫 문장의 목적어 생략이 단순한 사태가 아닌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생략하기도 하지만, 말하기 두려운 내용을 생략하기도 한다. 어떤 진실은 그 시대의 통념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기에 생략될 수 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통념에 도전한 이들을 고깝게 여긴다. 심하면 그들을 박해하려 든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왜 박해받았는가. 당대의 통념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박해를 피하려면 위험한 진실을 생략해야 한다.

혹시 <논어> 첫 구절에서 공자는 당시의 통념에 도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너무 위험한 진실을 명백하게 다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문장 일부를 생략한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점을 확실히 하려면 공자가 산 시대의 통념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논어> 첫 구절만 읽어서는 부족하다. <논어> 전체를 다 읽어도 부족하다. <논어>를 포함하되 그것을 넘어 있는 역사적 배경에 대해 지식을 쌓아야 한다.

아니, 단 한 문장을 이해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그렇다. 그렇게 어렵다.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절감하면, 남의 말과 글을 곡해하고 비방하는 일이 지금보다는 줄어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