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한상엽

지난달 전국이 난데없는 듣기 평가로 몸살을 앓았다. 시험이 어려워서인지 저마다 답도 다르다. 답이 다르면 출제자에게 묻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 시험은 출제자가 무시당한다. 출제자가 해답 설명을 하는데, 수험생들이 그게 아니란다. 심지어 다른 답을 내놓은 사람들에게 거짓말쟁이, 아첨꾼이라고 비판하기까지 한다.

9월 21일 미국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대화 후 행사장을 나오다가 던진 말이 이 소동의 시발점이다. 이 장면을 포착한 MBC는 윤 대통령이 “미국 의회 의원들에게 욕설에 해당하는 단어를, 바이든 대통령에게는 비속어에 해당하는 단어를 섞어 발언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야당은 “외교 참사”라며 대통령을 비판했다.

논란은 싱겁게 끝났다. 여러 언론사에서 음향 장비를 통해 검증하고, 전문가들 의견도 청취했다. 정답은 “정답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음원이 불명확해서 단어를 특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가 결론이었다. 윤 대통령을 비판하던 언론사들마저 슬그머니 ‘바이든’인지 ‘날리면’인지 불분명하다는 식으로 논조를 바꾸더니 그보다는 좀 더 명확히 들리는 것 같은 ‘이 XX’를 물고 늘어졌다. 원래 ‘바이든’이 본질이 아니라 대통령이 상소리를 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전형적인 ‘가차 저널리즘’(Gotcha Journalism)이다. 가차 저널리즘이란 “정치인의 실수나 해프닝을 꼬투리 삼아 집중적으로 반복, 기사화하는 보도 행태”를 뜻한다(김동률, 2005). 카메라를 들고 매복해 있다가 한마디 실수라도 하면 달려들어 조롱하며 희희낙락한다. ‘가차 저널리즘’은 과거 언론학자들이 노무현 정부에 대한 보도 행태를 비판하면서 제기했던 문제다. 그 학자들은 왠지 윤 대통령을 향한 ‘가차 저널리즘’에 대해서는 별 할 말이 없는 것 같다.

‘바이든-날리면’ 사태가 더 주목을 끄는 것은 ‘바이든’이라 들었다는 이들이 보이는 확신의 강도 때문이다. 이들은 ‘날리면’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아무리 들어도 ‘바이든’이라는 것이다. 거의 종교적 확신이다. 윤 대통령의 목소리는 이미 ‘외교 참사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미국 대통령에게 상소리를 한 것으로.

그러나 인간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 1999년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철학자로서는 유일하게 선정되었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약 70년 전 그림 한 장으로 우리 인식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림 한 장을 보여주며, ‘이것이 오리냐, 토끼냐’고 물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토끼도 아니고 오리도 아니다. 그것은 그림일 뿐이다. 거기서 토끼 혹은 오리를 본 것은 당신이다. 그림의 의미는 바로 당신이 부여한 것이다.

우리가 확실하다 여기는 지식이 사실은 그리 확실하지 않고, 우리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처음이 아니다. 그보다 약 200년 전 임마누엘 칸트가 인간 인식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선 긋기를 시도한 바 있다.

칸트 이전 철학자들은 ‘안다’는 것이 대상에서 오는 감각 정보를 수용하는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칸트에게 ‘안다’는 것은 감각 정보를 우리가 주체적으로 처리, 종합한 것이다. 인식의 중심이 대상에서 주체로 전환된 것이다. 인간이 불완전한 만큼 이 정보 처리와 종합의 과정 역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불완전한 지식을 절대화할 것이 아니라 그 한계 앞에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가 인식의 과정을 철저히 해부한 것은 그가 그의 주저 <순수이성 비판> 서문에 밝히고 있듯이 종교적 신앙에 올바른 자리를 내주기 위한 것이다. 칸트가 태어나기 전 약 200년간 유럽은 처절한 종교전쟁의 시대를 겪었다. 나의 신에 대한 지식은 절대적이며, 저들의 신과 예배는 가짜, 이단, 악마다. 그러니 저들은 처단의 대상이다. 무려 200년간 종파 간에 무자비한 살육이 거듭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식으로 절대화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인식은 상대적이다. 만약 나의 신에 대한 지식이 일정한 한계를 가진 나 자신의 신념에 불과하다면, 상대방의 신념에 대해서도 그것을 하나의 신앙으로 인정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맥락에 따른 인식의 다양성을 지적한 것 역시 그 배경은 다르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두 개의 전쟁을 목격했다. 1차 대전에서 지휘관들은 자신의 군사전략을 위해 수백만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스는 특정 민족이 열등하다는 ‘확실한 지식’을 근거로 수백만명을 학살했다.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이들의 확신은 독단에 불과한 것이다.

‘바이든-날리면’ 듣기 평가에서 우리는 현대 한국의 독단이 난무하는 것을 본다. 그들이 여유를 갖고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날이 올까?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을 어려워하는 분들에게는 언제나 풍자의 귀재 조너선 스위프트가 걸리버의 입을 빌려 던지는 촌철살인이 대기 중이다. ‘그래, 당신들. 계속 싸워라. 계란을 위쪽으로 깨는지, 옆으로 깨는지, 당신들에겐 목숨보다 소중한 문제일 테니. 당신들이 소인국에서 소인배로 살아가는 이유 또한 바로 거기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