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시간을 보람 있게 보내기 위하여 다양한 취미 활동이나 공부를 하는 분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한 예입니다.

은퇴한 언론인 박정찬 선생은 2014년 주로 은퇴한 동료들과 함께 ‘영시(英詩) 공부 모임’을 만들어, 매달 한 사람씩 돌아가며 시를 소개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8년 가까이 공부를 해왔으니 영어 실력은 물론 인문학적 소양도 크게 깊어졌을 것이고 회원들 사이 정도 돈독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를 만나면 한 번쯤 모임에 나와 함께하면서 좋아하는 시 한 수쯤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예전에 언론과 인터뷰할 때 좋아하는 시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시를 소개하고, 제가 쓴 글들에 가끔 시가 등장하는 것을 눈여겨보신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박 선생의 요청에 응하지 못했으나 언젠가 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리된다면 영시를 소개할지, 독일시 아니면 우리나라 시를 소개할지 고민을 할 것 같지만, 우선은 괜스레 분수에 맞지 않게 있어(?) 보이는 시보다 모두 공감할 소박한 시가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아래의 시 ‘치자꽃 설화’와 같은 시입니다.

일러스트=김영석

박규리 시인의 ‘치자꽃 설화’는 참 독특한 시입니다. 시인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슬픈 이별 장면을 몰래 엿보듯 그려내고, 이내 시인 자신도 괴로워하며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내용입니다. 시로서는 낯설게 이야기(說話)를 담고 있고, 자칫하면 신파조로 들릴 만한 이야기지만 독자의 마음을 애잔하고 숙연하게 만듭니다. 특별한 설명이나 궁리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따라가며 읽으면 족합니다. 마치 슬픈 영화 한 편을 보는 느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어느 산사(山寺)에서 우연한 목격으로 시작된 일이겠지만 시인은 관심·관찰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연민 때문입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 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남자의 마음은 떠나보낸 여자 때문에 아프고 울적하여 또 마냥 흔들립니다. 그리하여 기도도 목탁도 제각각입니다. 적어도 시인에겐 그렇게 느껴집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가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가랑비 엷게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관찰은 이제 여자로 향합니다. 하얗게 피어 순결한 치자꽃 아래에서 잠시 마음을 달래던 치자꽃처럼 순결한 여자는 체념한 듯 산길을 휘청거리며 내려갑니다. 하필 가랑비는 쓸쓸하게 내리고 쑥국새는 한층 더 구슬피 웁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 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저물도록 독경 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시는 절정으로 나아갑니다. 사랑이 때로는 어렵고 괴로운 일이지만, 그래도 사랑한 적 없거나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라는 시인의 생각. 더욱이 시인은 자신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타자(他者)에 대한 연민, 그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