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10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는 흉흉했다. 얼굴에 흉터가 깊게 팬 남자부터 교복 여기저기 피가 튄 학생들, 마스크에 핏자국이 선명한 채 돌아다니는 이들까지. 핼러윈 데이까지는 아직 20여 일이 남았지만 놀이공원에선 이미 해골과 좀비, 시체들이 걸어다녔다. ‘귀신의 집’으로 가던 변재은(16)양은 “벽장에서 귀신이 나오는 공포 영화 ‘클로젯’을 가장 좋아한다”며 “귀신의 집이 얼마나 무서울지 굉장히 기대된다”고 했다.
#2. 캐릭터 디자이너 쪽으로 진로를 준비하는 대학생 김모(26)씨는 ‘진격의 거인’ ‘에반게리온’처럼 공포스럽고 잔혹한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요즘엔 ‘귀멸의 칼날’에 푹 빠져 있다. 김씨는 “밝고 명랑한 소년물 같으면서도 잔혹하고 기괴한 장면들이 심장을 쿵쾅거리게 한다”고 했다. 역시 ‘귀멸의 칼날’ 마니아인 나현채(26)씨는 “악역도 저마다 사연이 있어 매력적”이라며 “싸움 장면이 잔인하지만 통쾌함도 준다”고 했다.
혈흔, 상처, 괴물, 해골 같은 잔혹물이 MZ세대를 사로잡고 있다. ‘10월의 명절’이 된 핼러윈 데이 때만이 아니다. 액세서리부터, 기념품,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기괴한 소재가 이 세대의 ‘유희(遊戱)’로 자리 잡아 간다.
금기를 넘는 카타르시스
롯데월드에서 만난 중학생 김태이(15)양은 피범벅이 된 간호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좀비처럼 보이는 분장이 나 자신을 완전히 색다르게 만들어준다”며 “옷도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직업군의 것으로 골라 입었다”고 했다. 상처 분장을 한 남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몸에 진짜 상처를 낼 순 없지만, 흉터로 뒤덮인 분장을 하니 쾌감이랄까, 자신감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가상 일탈을 통한 카타르시스”라고 분석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공포 콘텐츠에는 금기(禁忌)가 등장하고, 금기를 깨는 일탈의 순간이 동시에 들어있다”며 “축제 역시 평소에 하지 못한 것을 하는 일탈의 의미가 들어있는데, 핼러윈이라는 축제가 그런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라고 했다. 어느 세대보다 입시 스트레스, 취업난에 시달리는 탓에 잔혹 콘텐츠에 빠진다는 해석도 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현실에선 재미있는 일도, 되는 일도 없어 삶의 통제감을 상실한 젊은이들이 색다른 방식으로 재미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보인다”고 했다.
배트맨보다 조커가 좋아
일상 탈주 욕망은 ‘빌런(악당) 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영웅보다 반(反)영웅에 오히려 매료되는 것. 영화 ‘배트맨’ 시리즈의 주인공 배트맨보다 악당 조커가 널리 사랑받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조커 분장을 한 최진영(18)군은 “영화 ‘조커’를 보고 그의 인간적 매력에 푹 빠졌다”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듯하면서도, 종래 규범을 깨는 듯한 자유분방함에 매료됐다”며 웃었다. 김주환(28)씨는 영화 속 악당들에게 끌려 ‘악당 출현’이라는 잡지까지 제작했다. 그는 “보통 사람은 살면서 마음을 억누르는 일이 많고, 나쁜 사람을 응징하고 싶어도 꾹 참고 사는데 악당들은 그 욕망을 맘껏 실현하는 존재”라며 “욕망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악당의 모습에 해방감과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일반적 잔혹함의 범위를 뛰어넘는 ‘고어물’ 마니아도 늘고 있다. 유튜브 채널 ‘조시 푸’의 운영자 조모(19)씨는 분홍빛 색조에 주인공의 신체가 훼손되거나 내부 장기가 튀어나오는 그림을 그린다. 그는 “귀엽고 발랄한 그림체에 내가 두려워하는 요소를 섞어 그리면서 공포감을 극복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잔인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접하면서 외적인 공포를 스스로 극복하는 심리 기제”라고 설명했다.
‘K좀비 콘텐츠’의 영향도 크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부터 ‘지금 우리 학교는’까지 한국의 좀비 콘텐츠가 세계적 흥행을 일구면서 젊은 세대가 잔혹 콘텐츠에 더욱 친숙해졌다는 것. 이동귀 교수는 “더 새롭고 더 잔혹한 콘텐츠로 눈길을 끌려는 일종의 ‘주목 경쟁’도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고통과 살육 코드를 지속해서 소비할 경우 폭력에 둔감해질 수 있다”며 “연례 행사가 된 핼러윈에서 죽음을 유희화하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은정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아동 심리와 관련해 유명한 ‘보보 인형 실험’을 보면 잔혹 콘텐츠를 접할수록 폭력에 둔감해지는 경향이 있다”며 “폭력적 행동을 영웅적인 것으로 묘사할수록 공격성이 강해진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