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가난한 동네 브루클린. 늦은 나이에 해리(자레드 레토)를 낳고 남편과 사별한 사라(엘렌 버스틴)가 낡은 아파트에서 복닥거리며 사는 곳이다. 어머니와 아들은 애증의 관계이지만 뜻밖의 공통점이 있다. 약으로 꿈을 이루려 하는 것이다.

영화 ‘레퀴엠’의 한 장면. 엄마 사라의 유일한 위안거리인 TV를 전당포에 맡기려고 끌고 가는 마약 중독자 해리(오른쪽)와 그의 친구 타이론. /CJ엔터테인먼트

해리는 엄마의 유일한 위안거리인 TV를 전당포에 맡기고 그 돈으로 마약을 하며 시간을 죽이는 날건달이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아예 마약 딜러가 되어서 한몫 잡아보자는 절친 타이론(마론 웨이런스)의 제안을 받았다. 그건 좀 위험한 일 같다고 생각했지만, 중산층 가정 출신 여자친구 마리온(제니퍼 코넬리)에게 옷가게를 차려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비즈니스’에 뛰어들었다.

사라는 단 음식을 좋아하는 TV 중독자다. 그 죄책감 때문인지 가장 즐겨 보는 프로그램은 다이어트 강의인 ‘태피 티본스 쇼’. 그런데 어느 날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진다. 바로 그 쇼에서 사라에게 출연해 달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을 기다리며 사라는 머리에 염색을 하고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해리의 고등학교 졸업식, 그 아득한 옛날 입었던 빨간 드레스가 맞는 몸매를 되찾는 것이 목표. 굶어서 못 빼니 병원에서 약을 받아왔다. “아침엔 보라색, 오후엔 파란색, 저녁엔 주황색, 밤엔 녹색.”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2000년 영화 <레퀴엠>의 내용이다. 마약 사용자의 경험을 담아낸 감각적인 연출로 전 세계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영화를 직접 본 적 없더라도 이 작품의 몇몇 특징적인 컷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여기는 영상이 아니라 서사와 철학을 논하는 자리. 20년도 더 된 영화 <레퀴엠>을 새삼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마약과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것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철저히 말살하는지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담론과 철학계의 담론이 서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도 그렇다. 분석철학이 주류를 이루는 영미 철학계에서 자유의지를 둘러싼 논쟁은 이런 식이다. 슈퍼마켓에서 사과 대신 오렌지를 산 나의 행위는 자유의지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나의 뇌와 호르몬 등의 신경 작용에 따른 결정론적 행위인가? 인간의 모든 사고가 결국 뇌의 작용일 뿐이라면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자적 자유의지 역시 불가능하거나 일종의 ‘착각’ 아닌가?

철학 전공자로서 필자는 이런 논의가 재미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 아무튼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 선택하고 있고 그 결과에 따른 책임을 지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에 대한 현실의 담론은 대체로 이렇게 전개된다. 시급 1만원에 편의점 알바를 하는 갑돌이는 과연 자유로운 것인가, 아니면 경제적 상황에 몰려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된 것인가? 그 알바에게 줄 돈을 아끼기 위해 손수 야간 타임을 맡는 편의점 점장의 선택은 자유로운 것인가, 아니면 상황에 쫓긴 불가항력인가?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어느 한쪽의 입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자유의지를 둘러싼 입장 차이보다는 양쪽의 주장이 지니고 있는 공통의 전제를 더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정치적 박해, 주변의 과도한 압력, 따돌림, 괴롭힘, 폭행, 더 나아가 극심한 경제적 곤궁은 우리가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병들어 있다면 자유의지를 발휘하기 어렵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우리는 자유의지의 당연한 전제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오늘의 질문. 마약의 사용은 자유의지의 결과인가? 다른 사람이 몰래, 혹은 강제로 투약하지 않는 한, 첫 번째는 자유의지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마약은 동물의 뇌와 신경 속 보상회로와 쾌락중추를 망가뜨린다. 한번 마약의 맛을 들이면 식음을 전폐하고 마약만 원한다. 이렇게 뇌가 망가진 상태에서 계속 약을 찾는 사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레퀴엠>으로 돌아가 보자. 해리는 타이론과 마약 딜러 노릇을 하기 위해 떼어온 물건을 직접 주사하며 점점 더 심한 중독자가 되고 있다. 여자친구 마리온 역시 중독이 더 심해져, 결국 마약을 얻기 위해 몸을 파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사라의 경우는 실로 처참하다. ‘살 빼는 약’이라고 처방받은 마약 성분의 각성제와 진정제에 중독된 나머지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며 거리를 쏘다니다가 정신병원에 감금당한 것이다. 이들의 자유의지는 어디 있단 말인가?

2022년 10월, 마약 문제는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이 되고 말았다. UN이 정한 마약청정국 지위는 잃어버린지 오래. 특히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부터 마약이 우리의 일상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단속을 통해 적발된 마약의 양이 2017년에는 69.1kg이었던 반면 2021년에는 1272.5kg으로 무려 18.4배 폭증한 것이다. 마약범죄자 역시 같은 기간 719명에서 4998명으로 늘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마약 유통 경로가 온라인으로 음성화된 탓이 없지 않겠으나, 마약 단속과 수사의 노하우를 지닌 검찰의 손발을 꽁꽁 묶은 이른바 ‘검수완박’과 무관한 현상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민주주의란 주권자인 국민들이 온전한 자유의지를 발휘하여 스스로의 대표자를 뽑고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온 나라가 마약천국이 되건 말건 검찰의 칼만 부러뜨리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지닌 이들을 ‘민주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다. 스스로 ‘자유주의자’라 칭하는 이들 중 일부는 마약의 제조나 판매와 달리 혼자 즐기는 것을 탓할 수 있느냐는 태도를 취하곤 하지만, 그 또한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다. 마약은 뇌를 망가뜨리고 사용자를 노예로 만든다. 자유의지의 토대를 파괴하는 마약을 자유의지의 이름으로 옹호할 수는 없다.

<레퀴엠>은 스포일링이 불가능한 영화다. 그 어떤 의외의 사건이나 반전도 없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을 빼앗긴 채 환각과 환청에 사로잡히거나 금단현상으로 몸을 떨며 고통 받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독버섯처럼 퍼진 마약,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 사회 역시 수렁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정치권의 초당파적 협력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