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늘 교양과 인성 교육을 강조하셨다. 밥상머리 교육은 물론 빠듯한 살림에도 다양한 책으로 책장을 그득 채우셨다. 기대에는 못 미쳤으나 덕택에 그럭저럭 교양서적과 한국 소설 등을 읽으며 바른 삶의 소양을 쌓았다.
염상섭, 김동인, 이효석, 김유정, 손창섭 등의 단편과 박종화, 유주현의 역사소설을 즐겼다. 교양서적도 역사 관련 책에 마음이 끌렸다. 어린 학생답지 않게 공상 소설보다는 왠지 토속적인 우리 이야기가 좋았다. 변영로의 ‘명정 40년’, 양주동의 ‘문주반생기’ 같은 신변잡기에서 저명인사의 ‘꽐라’(잔뜩 취한 상태)를 엿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태준의 ‘무서록’, 동양화가 김용준의 ‘근원수필’은 읽고 또 읽어도 새로운 맛이 났다. 선비 정신을 간직한 윤오영은 소소한 일상사를 소재로 여운이 남는 글을 썼다.
고등학생 때 겁도 없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손을 댔다가 식겁하고 책장을 덮었다. 난해할 뿐더러 사람 이름이 너무 복잡해서 앞뒤 내용 연결이 어려웠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이후로 외국 소설책을 건드리기 겁이 났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외국의 고전을 섭렵하지 못한 후회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국어 시간에 알게 된 전광용의 단편 ‘꺼삐딴 리’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도대체 꺼삐딴 리가 뭐지?” 글을 읽으면서 ‘캡틴 리’의 일본식 발음이 가미된 러시아 말임을 알고 빙긋이 웃었던 오래전 기억이 어렴풋하다. 해방 전후의 격변기를 살면서 단물만을 좇는 소설 속 기회주의자인 의사(醫師) ‘이인국’에게 북한 주둔 소련군 장교가 붙인 별칭이었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한국 단편집에서 ‘꺼삐딴 리’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줄거리가 가물가물해서 다시 읽어 볼 생각에 책을 펼쳤다. 워낙 오래돼서 처음 대하는 글처럼 새로웠다. 곰팡내를 견디며 길지 않은 소설을 앉은자리에서 읽었다. ‘꺼삐딴 리’라는 말이 재미있다는 기억밖에 없었는데 나이가 들어 다시 보니 시사하는 바가 큰 글이다.
채만식의 소설 ‘이상한 선생님’에 등장하는 대갈장군 박 선생님 ‘뼘박’도 ‘꺼삐딴 리’와 대동소이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해방 후 좌우 대립, 미 군정을 거치는 격동의 세월을 약삭빠르게 산 기회주의자 중 하나다. ‘뼘박’은 한 뼘밖에 안 되는 작은 키의 못생긴 주인공 박 선생님을 비하하는 별명이다.
두 소설 모두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꺼삐딴 리’나 ‘뼘박’의 가증스러운 행동에 분노가 치민다. 의사와 학교 선생님인 주인공이 많이 배우고 안정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 더더욱 그렇다. 한반도에서 특히 지난 100여 년은 누구든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는 암울했던 시대가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만의 영달을 위해 서슴없이 양심을 파는 파렴치를 묵과할 수는 없다.
불쑥 ‘꺼삐딴 리’와 ‘뼘박’을 화제에 올린 이유가 있다. 유유상종인 ‘나카무라 스미스’라는 놈이 난데없이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나카무라 스미스’가 원래 있는 말인지 아니면 최근에 누가 새로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나카무라’는 일제강점기를 그린 영화나 연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 듣는 순간 면도날 같은 눈초리에 ‘도리우치’(헌팅캡)를 눌러쓰고 우리 민족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악질 일본 고등계 형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편 ‘스미스’는 덩치가 집채만 하고 어수룩한 듯하면서도 잇속은 빈틈없이 챙기는 서양인이 연상된다.
이질적인 두 단어가 합하여 ‘창씨개명’에 앞장섰던 일본 앞잡이가 재빠른 변신으로 미군에게 ‘콩글리시’로 귀엣말을 소곤거리는 박쥐 같은 인간의 이미지가 손에 잡힐 듯하다. 어감이나 의미 전달 면에서 ‘나카무라 스미스’가 기회주의자의 별칭으로 단연 압권이다. 대체 이런 기막힌 말은 누가 지어내는지, 세상에는 재주꾼이 참 많기도 하다.
지난봄 정권 교체기에 소위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이슈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법 제정을 강행하려는 여당과 결단코 막으려는 야당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졸속과 갖은 편법이 난무하는 국회의사당의 풍경은 가히 목불인견이다. 검찰 내부도 편이 갈려 볼썽사납게 죽기 살기로 싸웠다. 오죽하면 현직 부장검사가 몇몇 검찰 고위층을 ‘나카무라 스미스’라고 싸잡아 비난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을까.
최고 엘리트 집단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검찰에서조차 민망한 말과 행동이 횡행하는 지경에 국민은 어리둥절하다. 자고로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 구경 중 최고라는데, 웬걸, 이번 다툼은 재미는커녕 씁쓸하기만 하다. 아무쪼록 ‘나카무라 스미스’라는 낙인이 자업자득의 업보인지, 아니면 허무맹랑한 음해인지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길 바란다.
돌고 돌아 이제는 ‘검수원복’(검찰 수사권 원상회복), 나아가 ‘감사완박’(감사원 독립성 완전 박탈) 논란까지 빚고 있다. 자고 나면 싸움박질만 하는 정치권 기사가 신문을 도배하는 풍진 세상이다. 훗날 어느 문인(文人)이 작금의 혼돈을 소재로 ‘나카무라 스미스’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쓰지 말란 법이 있는가. 역사를 두려워할 줄 아는 지혜가 절실한 마당에 자기 성찰은 고사하고 소모적 정쟁으로 허구한 날을 보내고 있다.
아! 어떻게 일군 나라인데…. 지켜보는 꼰대의 가슴에 수심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