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로 보면 산마루요, 세로로 보면 산봉우리구나.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에 따라 모습이 각기 다르네.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건, 내가 여산 속에 있기 때문이지(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소식(蘇軾)의 제서림벽(題西林壁)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하다!” “에베레스트산을 처음 정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정복했다!”

이런 말들은 터무니없다. 에베레스트산 입장에서 얼마나 어이없겠는가. 쓰레기 분리 배출도 쩔쩔매는 자그마한 생물이 천신만고 끝에 기어 올라서 정복 운운하다니. 개미가 천신만고 끝에 인간 발끝부터 기어 올라와, 중간에 죽어 나가기를 거듭한 끝에, 간신히 정수리까지 올라와서 외치는 거다, 인간을 정복했다! 어이없지 않은가. 개미도 인간을 정복한 적이 없고, 인간도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한 적이 없다. 에베레스트산에 고생 끝에 간신히 다녀온 사람만 몇 명 있을 뿐.

18세기 조선 화가 겸재 정선이 중국 여산에서 은거한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고사를 그린 '여산초당도(廬山草堂圖)'. 2017년 보물로 지정됐다. /간송미술관

1084년 봄, 중국 송나라 문장가 소식(蘇軾)은 에베레스트산 대신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여산(廬山)에 다녀온다. 그러고 “여산을 정복했다!”고 외치지 않는다. 그 대신 저 유명한 ‘제서림벽(題西林壁)’이라는 시를 지어 여산 서쪽에 있는 서림사(西林寺) 벽에 써 놓는다. 산속에 있기에 산의 진면목을 모른다니, 미숙한 등산인이라면 질색할 내용이다. 죽을 고생을 해서 험준한 산속까지 왔건만, 산 안에 왔기에 산의 진면목을 모른다니.

이런 체험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난 너 같은 놈을 잘 알아”와 같은 말은 얼마나 오만한가. 함께 살아도 알 듯 모를 듯한 게 사람이다. 동거나 결혼을 하면, 상대를 잘 알게 되기 마련이다? 꼭 그럴까? 살면 살수록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사람의 넓이와 깊이는 만만치 않다. 게다가 자기가 서 있는 위치의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에 따라 모습이 각기 다르다.”

왜 그럴까?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건, 내가 여산 안에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삶의 진면목을 알기 어려운 것은 삶의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바깥으로 나간 이는 모두 죽었다. 우리가 자기 진면목을 알기 어려운 것은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밖으로 완전히 나간 이는 모두 미쳤다.

인간은 인간의 한계 밖으로 나가 보고 싶어서 우주여행을 떠난다. 우주여행을 하는 이유는, 지구 밖을 보고 싶다는 것뿐 아니라 지구 외부에서 지구를 보고 싶다는 것도 있다. 달에 착륙해서 달 표면을 찍은 사진만큼이나 달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이 감동적이다. 보기 어려웠던 보금자리의 전모를 본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소식은 ‘제서림벽’과 비슷한 취지의 말을 고시 공부하는 사람에게 한 적도 있다. 당시는 왕안석(王安石)이라는 권력자가 획일적인 고시 교과서를 만들고 그 내용에 부응하는 이들만 관료로 뽑으려고 설칠 때였다. 1078년 소식이 서주(徐州) 태수로 봉직할 때, 부하인 오관(吳琯)이 바로 그 획일적인 시험공부에 골몰한다. 그러자 소식은 그에게 ‘해의 비유(日喻)’라는 에세이를 써 준다.

“장님이 해가 뭔지 몰라서 눈이 환한 이에게 해에 대해 물었다. 눈이 환한 이는 해가 쟁반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장님은 쟁반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해가 뭔지 감을 잡았다. 이후 종소리를 들으면 그게 해라고 여겼다. 또 다른 눈 환한 이가 말했다. 해의 빛은 촛불과 같다. 그러자 장님은 초를 만져보고 해가 뭔지 감을 잡았다. 이후 피리를 더듬어보고 그게 해라고 여겼다. 해, 종, 피리는 서로 매우 다른데도 그 소경은 그게 다른 줄 몰랐다(生而眇者不識日, 問之有目者, 或告之曰, 日之狀如銅槃, 扣槃而得其聲, 他日聞鐘, 以爲日也. 或告之曰, 日之光如燭, 捫燭而得其形, 他日揣籥, 以爲日也, 日之與鐘籥亦遠矣, 而眇者不知其異).”

우리가 알고 싶어서 애태우는 것들, 인생, 미래, 신, 우주, 도(道)와 같은 것도 다 이와 같지 않을까. 그런 것의 진짜 모습은 미약한 인간이 파악하기에 너무 크고, 깊고, 입체적이다. “보기 어렵기로 하자면, 도가 해보다 더하다. 사람들이 도를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소경과 다를 바 없다(道之難見也甚於日, 而人之未達也, 無以異於眇).” 왜 도를 파악하기 이토록 어려울까. 파악 대상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모습을 바꾸어가니 어찌 전모를 파악할 수 있으리오!(轉而相之, 豈有旣乎)”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가 진리, 신을, 미래를 안다고 강변하곤 한다. 에베레스트산에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했다고 주장하고, 여산에서 여산을 안다고 주장하고,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을 안다고 주장한다. 여산 속에서는 여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는데, 한국에서 산다고 한국을 알겠는가. 살고 있다고 삶을 알겠는가. 그들은 해를 보지 못하면서 해를 파악했다고 여기는 소경과 같지 않을까. “그러므로 세상에서 도를 논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본 데 기초해서 이름 짓고, 보지 못한 바에 대하여 억측한다. 그것은 모두 도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故世之言道者, 或卽其所見而名之, 或莫之見而意之, 皆求道之過也).”

사정이 이러하니, 자기만은 제정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자기 하나만큼은 똑똑하다고 강변하는 사람, 자기는 도를 파악했다고 설치는 사람을 만나면, 빨리 도망치는 게 좋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일으키곤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계가 있고, 누구나 은은하게 미쳐 있고, 그럭저럭 바보 같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자기 자신과 세계와 진리와 미래를 안다는 것이 그토록 어렵다면, 아예 안다는 일을 포기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도라는 것이 명료하게 정리되고, 관료 선발의 획일적 기준이 되면 안 될 뿐, 도대체 도를 알 수 없다거나, 도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해를 보기 어렵다고 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쟁반, 종, 촛불, 피리는 해가 아니다. 그들은 해의 여러 측면을 전해주는 비유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