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간첩선 서해안 침투 사건(1998년), 국무총리의 삼일절 골프 파문(2006년), 무상급식 주민투표 실패에 따른 서울시장 사퇴(2011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2013년), 주한 미국 대사 피습 사건(2015년), 전직 대통령 구속(2018년)….
이 사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대통령이 해외 방문 중 혹은 전후에 생긴 일이라는 점이다. 이른바 ‘순방 징크스’다. 순방 징크스는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하는 동안 현지 또는 국내에서 사건·사고가 생겨 순방 성과가 가려지는 일을 가리키는 말. 역대 대통령은 대부분 이 징크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취임 후 두 차례 해외 일정을 소화한 윤석열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18~24일 이뤄진 영국·미국·캐나다 순방 중,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조문 일정이 불발된 것을 두고 국내에서 논란이 일었다. 야당은 ‘외교 무능’이라며 맹공했고, 여야는 이 문제로 격한 공방을 벌였다. 윤 대통령이 뉴욕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난 뒤 퇴장하며 박진 외교부 장관 등에게 한 비공식 발언에 비속어가 포함된 것도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앞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참석차 다녀온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대통령실 공식 직책이 없는 민간인이 순방에 동행하고, 전용기에도 탑승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기간 여권의 내홍도 심화됐다.
◇北간첩선 침투에, 靑 전화 먹통까지
‘순방 징크스’의 역사는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순방 때마다 곤욕을 치렀다. 김 전 대통령이 1998년 11월 APEC 정상회의 참석 등 순방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때 북한 간첩선이 강화도 해안으로 침투를 시도한 일이 발생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귀국 기자회견에서 “보고받지 못했다. 처음 듣는 얘기다”라고 답해 논란이 일었다. 1999년 5월 러시아·몽골 국빈 방문 때는 ‘옷로비’ 의혹 사건이 터졌다. 고위공직자 부인들이 대기업 회장 부인으로부터 고급 옷을 선물받았다는 내용의 이 스캔들은 나라를 뒤흔든 권력형 비리 의혹 사건으로 커졌다. 귀국 기자회견에서 옷로비 관련한 질문을 받은 김 전 대통령은 “내 나이로는 과중한 스케줄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국가를 위해 성과를 내고 있는데, 국내 신문을 보면 이런 건 한쪽으로 밀어내고 옷사건을 대서특필하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2003년 5월에는 이른바 ‘청와대 먹통 전화 사건’이 터졌다. 방미 중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시 화물연대 파업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청와대에 전화를 걸었는데, 비서실 당직자들이 잠을 자는 바람에 전화를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화 교환원이 국정상황실로 전화를 돌렸지만 마찬가지. 경호실 당직자와 연결이 된 노 전 대통령은 ‘저희는 파업 상황은 파악하지 않고 있다’는 답변을 듣고 전화를 끊어야 했다. 청와대의 연락 시스템 부재와 기강 해이가 도마에 올랐다. 2006년 3월엔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가 사의를 표명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전 총리가 삼일절이자 철도 파업이 시작된 첫날, 지역 기업인들과 골프를 쳐 파문이 일었기 때문이다. 총리의 사의 표명은 노 전 대통령이 아프리카 순방을 떠나기 하루 전에 이뤄졌다. 노 전 대통령은 순방 중 기자단과 한 차례도 만나지 않았고, 이 전 총리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측근 비리, 성추행, 의전 홀대 의혹…
이명박 전 대통령 순방 때는 여권발 악재가 많았다. 2011년 8월 중앙아시아 순방 일정을 소화 중일 때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같은 해 9월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위해 출국했을 땐 김두우 청와대 홍보수석이 부산저축은행 로비 의혹으로 사퇴한 뒤 검찰 수사를 받았다. 한 달 뒤 미국 의회 연설을 위해 출국하기 직전엔 ‘내곡동 사저 논란’이 불거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순방 징크스가 절정에 달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사건·사고가 잦았다. 2013년 5월 첫 해외 출장이었던 미국 방문에서 윤창중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주미대사관의 인턴 직원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경질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있었다. 외신까지 이 일을 자세히 다루면서 국제적 망신을 샀다. 같은 해 9월 러시아·베트남 방문 때는 이석기 전 의원 내란 음모 사건과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 아들 논란이 연이어 터지면서 정국 혼란이 가중됐다. 2015년 3월 중동 순방 일정 중에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서울 도심에서 피습당하는 일이 일어났고, 같은 해 11월 터키·필리핀·말레이시아 순방 중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는 대통령 순방 기간 중 비상근무 체계를 가동했다. 전임 대통령들의 순방 징크스를 고려해 기강을 다잡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2018년 G20 정상회의 참석 등 3국(아르헨티나·체코·뉴질랜드) 순방 때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반부패비서관실 특별감찰반 직원들의 비위 의혹이 터졌고, 2019년 말레이시아 국빈 방문 때는 실무상 혼선으로 문 전 대통령이 인도네시아어로 인사를 해 외교 결례 논란이 일었다. 2017년 중국 국빈 방문 때는 대통령의 ‘혼밥’ 논란 및 중국 측의 의전 홀대 의혹이 제기됐다. 2017년 동남아 순방 때는 포항에서 규모 5.4 지진이 일어났고, 2018년 베트남·아랍에미리트 순방 중엔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됐다.
전직 청와대 관계자는 “정상 간 외교가 중요해지고 잦아지면서, 대통령 해외 방문 중 사건·사고가 터지는 확률이 높아지고 있다.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현지 상황이 실시간 중계되는 것도 순방 징크스의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순방 현지에서 일어나는 악재는 실무팀의 준비 부실과 자질 부족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며 “국내에서 터지는 이슈는 공직 사회의 기강 해이가 원인이거나, 복잡한 정치 사안과 관련해 대통령의 부담을 덜기 위한 여권의 의도가 반영된 경우, 대통령의 외교 성과를 깎아내리려는 야당의 정쟁 부추기기가 원인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앞서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는 “역사적으로, 또 몇 달간 살펴보면 대통령이 출국하시면 사람들이 꼭 그때 일을 벌인다”며 윤 대통령 순방 기간 자신을 제명하려는 ‘시나리오’가 가동될 것이란 관측을 내놓았다. 친윤 세력이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해외 순방 중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한 것으로, ‘순방 징크스’를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