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9월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가 대한제국을 방문했다. 윌리엄 태프트 당시 육군장관의 아시아 순방 사절단의 일원으로 온 것이다. 그녀에게 외교적 역할은 없었다. 그저 친선 사절 정도?

하지만 러일전쟁 후 풍전등화 신세였던 고종에게 앨리스는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고종의 눈에 루스벨트는 미국 황제, 앨리스는 공주였다. 그러니 그 공주를 잘 설득하면 혹시 미국이 우리를 지켜줄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기가 직접 앨리스양과 점심도 하고 그 자리에 황태자, 대신, 장군들까지 불렀다. 파격적 환대를 베푼 것이다. 자신의 아내가 묻혀 있는 무덤인 홍릉에서 환영 리셉션도 열고, 과거 청나라와 맞섰던 장소인 남한산성도 보여줬다.

일러스트=한상엽

부질없는 짓이었다. 애초에 앨리스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앨리스는 임기가 정해져 있고, 의회와 사법부의 견제를 받는 공화주의 국가 미국의 대통령 딸이다. 일개 사인(私人)에 불과한 그녀가 무슨 힘이 있어 꺼져 가는 대한제국의 불씨를 살려주나? 그녀가 떠나고 두 달 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서울에 있던 외교사절들은 모두 철수했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촌극이 벌어진 이유는 당시 고종이 군주제의 눈으로 공화제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혁명으로 출범한 미합중국의 세계사적 보편성은 왕정의 거부에 있다. 공화정은 혈연과 가족관계가 권력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데서 출발한다. 최고 권력자는 세습이 아니라 선출되며, 임기를 갖고, 의회가 만든 법, 사법부가 내린 판결에 따라야 한다. 최고 권력자도 다수의 협의를 거쳐 만든 합리적 제도에 복종해야 한다는 이 생각이야말로 인류사를 지배해온 왕정 체제와 다른, 공화제의 핵심적 본질이다.

미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영국에서 근대로의 여정은 17세기 중반 찰스 1세가 신하들의 손에 처형되면서 시작된다. 프랑스에서는 대혁명 후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독일 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1차 대전 말 민중봉기로 쫓겨나 죽을 때까지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차르와 그의 가족들은 볼셰비키들에게 총살당했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는 군벌들과 일본군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살아있는 신’으로 불리던 일본의 세습군주는 태평양전쟁 패전 후 모든 정치권력을 박탈당하고 공개적으로 자신은 ‘신이 아니라 인간에 불과’하다고 선언해야 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3·1운동으로 성립한 임시정부의 첫 번째 헌법 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원칙은 제헌헌법 이래 모든 헌법에서 1조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모든 근대 국가 마찬가지로 혈연과 가족관계에 의한 통치를 거부하는 지점에서 대한민국도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우리 정치사에는 여전히 군주정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가족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대통령의 아들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고, 형들도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영부인이 기업인의 돈을 받았다는 의혹은 결국 비극적 결말로 이어졌다. 독신이라 문제가 없을 줄 알았던 어느 대통령에게는 알고 보니 가족 못지않은 측근이 감춰져 있었다. 민주화 역사가 30년이 넘었다지만 여전히 우리는 전근대 왕정 군주 체제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대통령 가족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칭찬에 침이 마르는 사람들의 눈에 대통령은 세습군주로 보이고 있음이 틀림없다.

대통령이 ‘우리 임금님’으로 보이니 당파 싸움도 왕당파들 싸움처럼 유치하다. 그저 우리 임금님과 그 왕비님이 하는 일은 뭐든 옳고, 내가 싫어하는 임금님과 그 왕비님이 하는 일은 뭐든 싫다. 꼴 보기 싫으니 영부인 보고 대통령 해외 순방에도 따라가지 말라 하는데, 알고 보니 자기네 영부인은 타지마할 관광도 혼자 했다. 상대방 영부인은 결혼하기 한참 전 박사학위 논문까지 끄집어내 검증을 하자고 하면서 자기네 임금님의 표절 논문이나 그 부인이 공금 유용으로 밥 먹은 일에는 침묵한다. 원칙이고 뭐고 없다. 그저 우리 임금님과 그 가족 만세다. “이건 전쟁”이라면서, 시대착오적인 ‘결사보위’라는 용어가 횡행하고 급기야는 영부인을 지키겠다는 팬클럽들까지 등장했다.

이 저급한 왕당파들의 싸움에 영부인이 볼모로 잡혀 있다. 이제는 그녀를 놔줘야 한다. 왕당파 놀음에 종지부를 찍는 방법은 단 하나. 민주공화정의 기본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혈연과 친소관계가 아니라 투명하고 합리적인 제도가 권력의 기반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명칭이 제2부속실이든 뭐든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들로 운영되는 정식 영부인 보좌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제도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다. 이미 법으로 정해져 있는 특별감찰관도 조속히 임명할 일이다. 적절한 견제는 왕당파들의 준동에 예방주사가 되어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대통령 스스로 자신이 민주공화정의 지도자임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 배우자든 누구든 성역이 될 수 없으며 애정 어린 비판과 조언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밝혀야 한다. 영부인을 지켜주는 것은 결사보위 정신도 팬클럽도 아니다. 투명하고 합리적인 제도에 근거한 건전한 비판이야말로 왕당파의 싸움에 휘말려 버린 영부인을 구출하는 진정한 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