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2년 차 늦은 가을 ‘무의촌 파견’ 명령을 받았다. 옷가지와 세면도구 등 생활 필수품으로 간단하게 꾸린 가방을 들고 버스에 올랐다. 아흔아홉 굽이굽이 대관령을 넘고 강릉을 지나 한참을 더 달렸다. 짧지 않은 동안 머나먼 타지에서 어떻게 지내나 하는 근심에 내내 마음이 착잡했다. 버스 터미널에서 동행인 친구 둘과 택시로 외곽의 도립병원으로 향했다. 허름한 적산 건물의 외래 진료실에 석유난로가 힘겹게 열기를 뿜고 있었다.
듣던 대로 모든 시설이 열악했다. 명색이 도립병원인데 외과의인 원장을 포함해서 의사가 단 두 명뿐이었다. 또 한 분은 내과를 맡고 계셨다.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 전공의인 친구 둘은 각각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를 담당하면 됐다. 하지만 당시 벽지의 도립병원에서 신경외과 개설은 어불성설, 결국 네 개 진료과에서 받을 수 없는 환자를 도맡기로 했다.
빈 병실을 숙소로 배정받았다. 입원 환자가 없어 병동에 온기(溫氣)라고는 없었다. 병원 앞 구멍가게에서 구한 번개탄으로 연탄에 불을 붙여 병실 입구의 온돌 아궁이에 밀어 넣었다. 몸은 잔뜩 물먹은 솜처럼 천근만근인데 잠이 오지 않았다.
업무를 시작해 진료에 몰두하다 보니 잡생각이 사라졌다. 원장님이 의료 일선에서 환자와 소통하며 낙후된 환경에서 슬기롭게 헤쳐갈 수 있도록 요령을 일러 주셨다. 가끔은 친구 셋이 어울려 부둣가에서 소주잔을 두고 갓 잡아 올린 광어와 한치회를 즐겼다.
모자라는 실력으로 갖가지 환자를 소화하느라 진땀을 쏟았다. 뼈가 부러진 환자에게 어설프게나마 깁스를 했다. 귀에서 진물 나는 소년, 뜨거운 국에 화상을 입은 주방 아줌마, ‘허리깽이’와 ‘고뱅이’(허리와 무릎의 강원도 방언) 아픈 어르신, 소변 못 봐 쩔쩔매는 할아버지, 화류병 걸린 껄렁한 총각도 치료했다. 어려운 환자를 큰 병원으로 가라고 안내하면서는 가슴이 아팠다. 말이 쉽지 어디 없는 살림에 태백산맥을 넘는 일이 예삿일인가.
손자 둘을 데리고 오신 꼬부랑 할머니가 식구 모두 가려워 미칠 지경이라며 성화다. 약을 발라도 효과가 없던 차에 대처(大處)에서 용한(?) 분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하도 긁어서 피부가 엉망진창이다. 손가락 사이가 특히 심하고 가려워서 잠을 잘 수 없다고 하신다. 배운 지식을 총동원해 머리를 굴려 봐도 원인을 모르겠다. 임시방편으로 ‘항히스타민’제를 처방하고 며칠 후 다시 오시라 했다.
자리에 누웠는데 할머니 생각에 마음이 거북했다. 무엇보다 다음에 어떻게 해 드릴지가 큰 걱정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30촉 백열등을 켰다. 머릿속으로 피부병, 가려움증, 집단 발병 등의 키워드를 새기며 두툼한 내과 교과서를 뒤적였다. 어렵지 않게 딱 들어맞는 병을 찾았다. ‘옴’이었다.
다시 만난 할머니는 차도가 없다며 불만이 대단하셨다. 빙긋이 웃으며 ‘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큰 튜브에 담긴 연고를 넉넉히 드렸다. “동시에 온 가족이 함께 바르세요. 홑청도 죄다 뜯어서 삶고 이부자리는 햇볕에 말려야 해요. 반드시 속옷까지 홀랑 벗고 구석구석 빈틈없이 발라야 합니다.” 남사스럽다고 눈을 흘기면서도 얼굴은 환했다.
할머니는 다시 오시지 않았다. 결과가 궁금했으나 이후 ‘옴’ 환자로 병원이 장사진을 이룬 만큼 지긋지긋한 가려움증에서 해방된 게 분명했다.
좌충우돌하다 보니 반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서울행 버스에서 전공의 수련 중 의무 사항인 ‘무의촌 파견’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보다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추운 겨울에 병원의 ‘푸세식’ 화장실에서 궁둥이가 시리던 일도 추억이 됐다.
뒤돌아보면 뿌듯한 마음과 함께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무식한 초년생 의사가 무턱대고 환자를 진찰했으니 말이다. 오진으로 잘못된 치료를 받은 주민께는 거듭 죄송할 뿐이다.
전공의의 ‘무의촌 파견’ 제도는 이후 폐지됐다. 의사 수가 늘었고 교통이 원활해져서 쉽게 병원에 갈 수 있는 좋은 세상 덕이다. 더불어 의료보험 제도가 정착되면서 의료 사각지대가 점차 줄었다.
대한민국에서 벌써 해결된 줄 알았던 무의촌이 다시금 핫한 사회 이슈로 급부상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무의촌이 아니고 ‘무의(無醫) 병원’이다. 소위 ‘아산병원 간호사 사망 사건’이 보도되자 많은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초대형 병원에서 근무 중 뇌출혈로 쓰러진 간호사를 수술할 의사가 없다니, 일반인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돈 되는 인기 과(科)에 젊은 의사들이 몰리는 쏠림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불어 ‘워라밸’을 중시하는 신세대는 힘든 분야를 피한다. 의사들 사이에 머지않아 큰 수술을 받으려면 외국에 가야 한다는 자조 섞인 넋두리가 나온 지도 한참 됐다. 힘들고 위험 부담이 높은 수술에 따른 보상이 시원치 않은데 걸핏하면 밤새워 수술하는 분야를 전공할 어리석은 작자가 있을까.
지원자가 없어 뇌 수술이나 심장 수술 전문의는 이제 고갈 직전이다. 오래전 의무적으로 무의촌에 보내듯이 의사에게 특정 분야를 전공하도록 강제할 수도 없다. 수술 난이도에 걸맞은 수가가 마련되지 않으면 ‘무의 병원’의 안타까운 사태가 봇물 터지듯 할 것이 뻔하다.
무의촌에서 고생하며 힘겹게 이뤄낸 선진 의료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정부가 발 벗고 나서 하루빨리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야 마땅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