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연 닻프레스 대표는 자신이 한 아트컨설팅이 드라마에 영감을 준 것에 대해 “신기하고 재밌는 일”이라고 했다. “법무법인 태평양의 직원과 방문객이 ‘밍크고래’를 비롯한 전시 작품들을 좋아한다더라. 회사 사무실, 동네 작은 카페 등 일상적 공간 속에서 예술의 친절을 경험하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길 잃은 외뿔고래가 흰고래 무리에 속해 함께 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요. 저는 그 외뿔고래와 같습니다. 낯선 바다에서 낯선 흰고래들과 함께 살고 있어요. 모두가 저와 다르니까 적응하기 쉽지 않고 저를 싫어하는 고래들도 많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게 제 삶이니까요.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답습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중에서.)

지난달 종영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는 고래가 자주 등장한다. 자폐인인 주인공 우영우가 고래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영우는 시도 때도 없이 고래 얘기를 하고, 수족관에 갇힌 돌고래를 방류하라는 시위도 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각날 땐 머릿속에 고래가 유유히 헤엄친다.

이 드라마에 고래가 등장한 데는 드라마 자문을 맡은 법무법인 태평양의 역할이 컸다. 작가가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서울 종로에 있는 태평양 사옥을 자주 방문했는데, 사옥에 걸려 있는 고래 사진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태평양에 고래 사진을 건 숨은 공신이 있다. 사진작가이자 전시기획자인 주상연(52) 닻프레스 대표. 지난 2020년 태평양이 사옥을 강남에서 종로로 이전했을 때, 사옥에 전시할 미술품을 구성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주 대표는 200여 점의 작품을 설치했는데, 이 중 미국의 사진작가 브라이언 오스틴의 고래 작품들이 포함됐다. 드라마 ‘우영우’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26층 대회의실에 걸린 ‘밍크고래’다. 푸른 바다에서 거대한 고래가 유영하는 모습이 담겼다. 원작의 사이즈는 밍크고래의 실물 크기(가로 9.1m, 세로 1.8m)인데, 태평양에 걸린 것은 이를 가로 4m, 세로 80㎝로 줄인 것이다.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고래 사진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달 초 만난 주상연 대표는 “드라마 덕에 미술관 같은 곳에서만 예술을 감상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깬 것 같아 보람을 느꼈다”며 “사무실, 회의실 등 일상 공간에서 만나는 예술작품을 통해 삶이 한층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

◇우영우 고래 탄생시킨 숨은 공신

서울 종로구 법무법인 태평양 26층 대회의실에 걸려있는 브라이언 오스틴의 ‘밍크고래’. /태평양

-어떻게 태평양에 ‘밍크고래’를 걸게 됐나.

“2018년부터 닻미술관의 전시들을 봐온 태평양의 이준기 변호사가 사옥 이전을 준비하며 아트컨설팅을 의뢰했다. 로펌 이름이 ‘태평양’ 아닌가. 고래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미지가 있을까. 26층 대회의실은 3면이 유리로 돼 있는데, 브라이언의 ‘밍크고래’가 그곳에 있으면 고래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작품이 너무 커서 설치할 때 건물 엘리베이터를 쓰지 못하고, 계단을 통해 운반했다.”

주 대표는 태평양 측이 컨설팅을 의뢰할 때 “주로 생각이 복잡한 분들이 찾아오니 편안한 느낌을 주길 바란다는 점, 사람의 얼굴이 (작품에) 명확하게 담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점, 태평양의 상징색이 파란색이라는 점 등의 조건을 주문했다”고 말했다.

-또 어떤 작품을 전시했나.

“대부분 자연을 다룬 것들이다. 직원들 휴게 공간으로 향하는 복도에는 고래가 꼬리를 올리고 휴식을 취하는 장면의 사진을, 해외와 원격으로 화상 미팅을 하는 공간에는 비행기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진을 걸었다. 공간의 특성과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분위기, 각 공간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작품 간의 통일성 등을 고려해 평온한 자연물을 담아낸 사진 작품과 미니멀한 회화 작품을 배치했다.”

서울 종로구 법무법인 태평양에 걸려 있는 브라이언 오스틴의 작품들. 왼쪽은 2016년 작 'I'm Here', 오른쪽은 2009년 작 'A Farewell' /태평양

-인기 드라마에 영감을 준 셈인데.

“참 신기했다. 브라이언에게도 드라마를 보여줬는데, 너무 재밌어 하더라. ‘예술의 일상화’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일상화라면?

“일상 속에서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길 기회가 모두에게 열려 있고 계속 확장돼야 우리 사회가 풍요로워진다고 믿는다. 비싼 공간에 있다고 해서 다 좋은 작품은 아니다. 럭셔리 호텔 같은 곳에도 아무 맥락 없이 놓여 있는 고급 가구처럼, 죽어 있는 작품이 굉장히 많다. 회사 회의실, 동네 카페 같은 곳에 살아 숨 쉬는 작품이 걸려 있고 이를 사람들이 감각하고 즐기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우영우’가 인기를 끌기 전부터 (태평양) 직원들이 작품들을 굉장히 좋아하고, 덕분에 일하는 것도 즐거워한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우영우’ 이후로는 (26층 대회의실이) 일종의 성지 같은 곳이 됐다고 한다. 코로나 때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던 골프장 예약만큼, 고래 사진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대회의실을 잡는 게 힘들었다고 한다. 워낙 인기가 뜨거웠다, 하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ENA

◇한국보다 해외에서 유명한 ‘닻’

주상연 대표는 서울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고, 홍익대에서 사진디자인 석사를 마쳤다. 국내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 200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2007년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SFAI)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로 돌아온 그는 2010년 수제 책 공방 닻프레스와 전시 공간 닻미술관을 열었다. 서울 구의동에 있는 닻프레스는 주로 사진작가들의 작품집을 출판하고, 경기 광주에 있는 닻미술관은 출판 콘텐츠와 연관된 전시를 한다. 그는 “‘닻’은 사진과 예술, 책을 사랑하는 창작자와 기획자, 참여자가 모여 순수한 예술적 나눔을 실천하는 공동체”라고 했다. 브라이언 오스틴을 비롯해 린다 코너, 주명덕 등의 사진작가가 핵심 멤버로 활동한다.

-’닻’은 무슨 뜻인가.

“뿌리내린다는 의미다. 유행이나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근원적 가치를 지키자는. 창작, 연구, 전시, 출판, 교육, 해외 교류 등 다양한 일을 하는데 본질은 하나다. 예술 본연의 순기능을 회복하고 삶을 풍요롭고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가꾸는 일.”

-왜 만들었나.

“30대 중반쯤에 ‘한국에선 (예술가가)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즐겁게 하기가 어렵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과) 타협을 하거나, 비상한 전략을 세워야 생존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 보다 선진적인 나라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어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엔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하면서 자생하고, 대중과 나눌 수 있는 토양이 있더라. 창작부터 출판, 교육, 전시까지, 사진가부터 비평가, 컬렉터까지 모든 것이 풍성해야 훌륭한 작가와 작품이 나온다는 생각을 했다. 그 토양을 가꾸자는 생각에 닻 커뮤니티를 만들었고, 대중에게 공간의 제약 없이 예술을 전달하기 위해 책을 택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우리가 만든 책을 들고 해외 도서박람회에 많이 나갔다. 세계 최대 아트북 페어인 뉴욕 아트북 페어에 한국 출판사로선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다.”

닻프레스는 12년간 약 80권의 책을 만들었다. 현재 뉴욕공립도서관, 국제사진센터, 스탠퍼드대 등 해외 20여 곳의 도서관·미술관·대학 등에 닻프레스의 책들이 소장돼 있다. 뉴욕공립도서관은 닻프레스의 전 출판물을 소장 중이다. 최근에는 독일 바이에른주립도서관에서 6권의 책을 소장하길 원한다는 요청이 왔다. 오는 11월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사진 아트페어 ‘파리 포토’에 참여한다.

-모든 책을 소량 출판한다던데.

“우리가 만드는 책은 작가의 작업이 응축된 결정체다. 한 권을 만드는 데 길게는 3년까지도 걸린다. 더 정성스럽고 특별하게 만든다는 생각으로 작업한다. 예술품을 소장하듯 책을 소장하게끔.”

닻프레스 주상연 대표가 <아무튼, 주말>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작가인 주 대표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 언어를 뛰어넘는 것들을 담는다"고 했다. 그는 어디에서 영감을 얻느냐는 질문에 "자연"이라고 답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과 주로 작업한다.

“상업성이란 관점에서 봤을 때 변두리에 있는 작가들과 일하는 편이다. 브라이언이 대표적이다. 그는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했고, 상업 갤러리와 일하지 않는다. 린다 코너와 바버라 보즈워스도 도서관, 미술관 등 공적 기관하고만 일하는 작가들이다. 쉽게 말해 키아프(Kiaf)나 프리즈(FRIEZE) 같은 페어에 나오지 않는 이들이다. (상업적으로) 거대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선 거리감을 느낀다.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유명 작가의 협업 제안을 거절한 적이 몇 번 있다. ‘이미 상업적인 영역에서 충분히 다뤄지는 작가를 우리까지 다뤄야 할까’란 생각 때문이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도 ‘변두리’에 꽂힌 이유는.

“예술 하는 사람들끼리의 예술, 대중은 이해하지 못하는 단절된 예술을 보고 ‘이건 아니다’라고 느꼈다. 예술과 대중을 잇는 시냅스와 같은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뒤로는 주로 비주류 예술가들과 일하며 대중을 만났다.”

-아티스트북의 매력은 무엇인가.

“작품이 하나의 오브제라면, 책은 작가가 고민하고 천착해온 이야기를 통합적으로 담아놓은 것이다. 아티스트북을 소장한다는 것은 그 작가의 세계를 소장하는 것과 같다. 디지털 콘텐츠가 많아지면서 물성을 가진 책의 가치는 오히려 커진다고 본다.”

닻프레스의 출판물은 몇 만원부터 수백만원까지 값이 다양하다. 최근 출판된 미국 사진작가 크리스 매카우의 아트북 ‘서킷(CIRKUT)’은 가격이 320만원이다. 총 20권이 제작됐는데 이미 10권 이상 판매됐다.

-재정적 어려움은 없나.

“자급자족할 수 있는 예술 공동체를 만드는 게 목표였는데, 아직까지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래도 예술가들의 일터이자 나눔의 매개로서 공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12년간 ‘닻’을 운영하며 힘든 점은.

“국내에서 이해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뭘 만들면 ‘외국에 갖고 나가야지’란 생각이 들더라, 하하!”

-꿈이 있다면.

“규정되지 않고, 고립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흔들리지 않는 채로 닻의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고 싶다.”

주 대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이렇게 덧붙였다. “더울 때 나무 그늘에 앉았는데 바람이 살랑 분다고 생각해보라. 그 순간 자체가 자연의 무작위적 친절 아닌가.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이나 작품 또한 누군가에게 안식이 될 수 있다. 예술이 특별한 누군가가 특별한 어딘가에서 즐기는 것이 아닌,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닻이 무작위적인 예술적 친절을 나누는, 그런 통로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