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 톰 뷰캐넌이 진 리키를 마시는 장면.

거창한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민족이나 조국, 애국이나 국가 같은 말들을. 뼛속까지 개인주의자라서 그럴까. 인생의 책이라는 말도 그렇다. 좋아하기에는 너무 크다. 이건 아르젠티노 사우르스의 대퇴골 만큼이나 무시무시한 것이다.

인생도, 책도, 개별적으로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인생의 책이라니… 하지만 이 계절의 책 같은 건 좋다. 참 좋다. 게으른 사람이라서 이런 걸 뽑아 본 적이 없는 나는 앞으로 이런 걸 뽑아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이러고 말겠지.) 봄에는 도다리쑥국을, 여름에는 민어탕을, 가을에는 대하 소금구이를, 또 겨울에는 어복쟁반을 찾아 먹듯이.

서설이 길었군요. 여름의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여름 중에서도 늦여름의 책. 이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다음 날은 날씨가 푹푹 쪘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가장 더운 날임에 틀림없었다.” 차 안의 왕골 시트에 불이 당겨질 정도로 뜨거웠다고 말한다. 뭔지 아시는 분?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다.

나는 중학교 때 이 책을 처음 읽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스무 살 때는 유명한 첫 문장에 꽂혔다. 모두 너처럼 유리한 환경에 놓여 있지 않다는 걸 명심하라는 말에. 세 번째에는 이 소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셔츠를 공중으로 던지며 자랑하는 남자와(웬 방정?), 그걸 보고 아름답다며 흐느끼는 여자를 보며(웬 소란?) 사이코 드라마인가 싶었다. 지금의 단계는 이러하다. 나 또한 저들 이상으로 유치하고 이상하다고,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오래도 걸렸다.

이렇게 말한 건 무라카미 하루키였던 것 같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위대한 개츠비’는 김욱동 번역이 좋아서 계속 읽고 있다. 하루키 님은 아마 영어로 읽으셨으니 나와 감흥이 또 다를 것 같은데… 나는 ‘친구’까지는 모르겠고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 말하거나 자기만의 해석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순간 좀 반할 수도 있겠다. ‘이거 개츠비가 입을 만한 핑큰데?’라거나 ‘심벌즈처럼 울리는 게 데이지 목소리 같아’라거나. ‘그 순간’이겠지만 ‘그 순간’뿐이라서 더 그럴듯하지 않나.

그렇다. 좋은 소설은 이런 것이다. 읽는 사람에게 흔적을 남긴다. 상처일 수도 있고, 깨달음일 수도 있고, 소설의 무엇을 따라 하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소설의 인물처럼 옷을 입거나, 말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먹고 마시기. 나는 그래서 늦여름에, 더위에 지칠 대로 지쳤지만 곧 이 여름이 끝날 거라는 작은 희망을 붙들며 버티고 있는 이 여름에 진 리키를 마신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그들이 진 리키를 마시기 때문이다.

데이지와 개츠비, 베이커와 톰과 이 소설의 화자인 닉이. 더운 날, 그들은 서로 적의를 주고받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톰 말고는 모두 함께 있는 방에서 데이지가 개츠비에게 키스한다. 그러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아냐고 묻는다. 베이커는 이 자리에 숙녀가 있다는 걸 잊었느냐고 하는데. 톰은 어디 갔나? 데이지가 남편인 톰에게 차가운 음료수를 만들어 오라고 심부름시켜서 음료수를 만들러 갔다. 데이지는 남편이 나가자마자 개츠비를 당겨 키스했던 것이다. 데이지는 왜 그러나? 그냥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걸 수도 있지만 인과를 찾자면 이렇다. 톰이 거실에서 애인과 긴 통화를 하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해야 했다. 방금 전에. 그런 굴욕은 참을 수 없지.

이들이 쭈욱 들이켜는 장면을 보면 진 리키가 마시고 싶어진다. 참을 수 없이. 톰이 얼음으로 가득 차 찰랑거리는 진 리키 네 잔을 쟁반에 받쳐서 방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장면부터 마음에 진 리키가 차오른다. 그렇다. 진 리키는 얼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나는 미식축구 선수였다는 이 꽤나 거들먹거리는 부잣집 아들 톰 뷰캐넌이 경력을 사칭한 개츠비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데, 이렇게 얼음을 가득 채운 것만은 칭찬해주고 싶다. 최소한 톰은 칵테일이 뭔지, 진 리키가 뭔지는 아는 사람인 것이다. 나는 남자든, 여자든 술에 대해 잘 아는 분들에게 끌린다. 그게 술이든 뭐든 배울 게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술이라면 더 좋지 않나 싶고. 그분들 앞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면서 그분들이 풀어놓는 술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여야겠죠?

얼음이 가득 담긴 진 리키 한 잔. /위키피디아

진 리키는 얼음이다. 그토록 더운 날은 더더욱. 얼음은 곧 녹아 버릴 것이므로 잔뜩 넣어야 한다. 집에서 얼린 작은 정사각형 얼음이 아니라 편의점에서 산 단단한 돌얼음 같은 얼음으로. 얇게 썬 라임 조각 두 개가 붙어 있고, 불균질하게 부순 얼음이 빙하처럼 끝까지 차 있게끔 날씬한 톰 콜린스 잔을 가득 채워야 한다. 라임즙과 진과 탄산수로. 내게 진 리키는 얼음을 마신다고 생각하며 마시는 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임도. 어떤 칵테일 레시피북에서는 진 리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산에 올라가 마시는 차디찬 샘물 다음으로 시원하다며, 여름 공식 음료라고. 대공감!

그렇다. 진 리키는 술이 아니다. 술보다는 음료. 진과 라임즙을 거의 3대 1로 타서 만드는 이 술은 처음에는 꽤나 세지만 탄산수, 그리고 얼음이 녹으면서 생기는 물로 점점 옅어지고, 얼음이 다 녹을 때쯤이면 술보다는 음료에 가까워진다. 이렇게 긴 시간을 두고 마시는 칵테일을 롱드링크라고 하는데, 나는 진 리키를 마시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진 리키를 만들어 가져오면서 얼음이 다 녹기 전에 이 글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마시려고 했지만 아직 쓰고 있다. 얼음이 다 녹았는데…

여름은 좀 그렇지 않나. 어떤 일이 벌어질 것만 같고, 벌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저질러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여름은 뜨겁다. 사람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이열치열이라지만 이 소설은 뜨거운 소설이 아니다. 서늘하게 뜨겁다. 아니, 그보다는 온화하게 뜨겁다고 해야겠지. 나는 그래서 ‘위대한 개츠비’와 진 리키를 좋아한다.

나는 생각하고 있다. 왜 네 잔일까? 사람은 다섯 명인데. 그는 만들면서 이미 마신 걸까? 알 수 없다. 레시피는 나오지 않는다. 그저 뻔뻔하고 오만한 잘난 남편 톰 뷰캐넌이 진 리키를 쟁반에 받쳐들고 가지고 오는 게 이 책에서 진 리키를 위해 할애된 가장 화려한 부분이다. 난 그래서 더 좋다. 내 식대로 진 리키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술이 모두에게 맛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진 리키는 한 입을 마시고서 ‘정말 맛있어!’라고 할 만한 술은 아니다. 누군가에는 시고, 떫고, 밍밍할 수 있다. 이게 뭐냐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 리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친구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어느 순간 알게 되었는데, 식성이 성격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쨍하면서 맑고 산뜻하게 시트러시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성격은 뭐 말 안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