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40대 이상 실력 있는 뇌혈관 의사는 거의 고갈된 상태다.’

지난달 말 서울아산병원 30대 간호사가 뇌출혈(뇌동맥류)로 쓰러져 사망한 이후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외과 방재승 교수가 온라인에 실명으로 올린 글이 충격을 던졌다. 의료 강국 평가를 받던 한국 의료 시스템에 사실상 사형선고를 내렸기 때문. 이번 간호사 사망 사건이 비단 특정 병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생명과 직결된 필수 과목에서 충분한 숙련의를 확보하지 못한 우리 의료 체계 전반의 문제라는 것이다.

최근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 중에 쓰러진 30대 간호사가 뇌수술을 할 의사가 없어 사망하면서 필수 과목 의사가 부족한 한국 의료 실태가 드러났다. 사진은 지난 10일 아산병원 응급실에 환자가 실려가고 있는 모습./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당시 간호사는 개두술(두개골을 열어 하는 뇌 수술)을 할 수 있는 전문의가 병원에 없어 수소문 끝에 서울대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사망했다. 온라인에선 ‘간호사가 아니라 의사였으면 어떻게든 살렸을 것’ ‘서울대병원까지 가느라 골든타임을 놓쳤다’ 등 아산병원 의료진을 향한 비난이 이어졌다. 전 세계 신경과 분야 평가 8위, 국내 뇌졸중 적정성 평가에서 최고 등급을 받은 국내 최고 수준 대학병원에서 일어난 일이라 충격이 컸다. 하지만 최근 진행된 보건복지부 현장 조사 결과 당시 서울대병원 외에는 수술 가능한 의사가 있는 병원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방재승 교수는 본지 인터뷰에서 “굴지의 대형병원 현직 간호사가 근무 중 사망한 사실 자체는 매우 안타깝고 참담한 일”이라며 “하지만 특정 병원과 의사의 문제로만 몰고 가면서 사태의 본질이 흐려져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한국 신경외과와 필수 분야 의료계는 꽤 이전부터 무너지고 있었는데 간호사 사망으로 겨우 이슈가 되고 있다. 이제라도 의사 확충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은퇴 앞둔 ‘개두술’ 의사가 전체의 60%

의료계에선 “필수 전공 과목에서 의료 공백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우려한다. 아산병원의 경우 개두술이 가능한 뇌혈관 전문의가 2명 있는데, 사건 당시 1명은 학회 참석으로 해외에 나갔고, 다른 1명은 휴가로 지방에 있어서 제때 병원에 올 수 없었다고 한다. 한 대학병원 외과의는 “당직 근무를 위해선 최소 3명이 있어야 하는데 필수 인력조차 확보를 못한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국내 여건상 2명도 적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 대한뇌혈관외과학회에 따르면 병원별로 숙련된 개두술 가능 의사(100회 이상 수술 경험 보유)는 평균 1.6명이다. 아산병원을 비롯해 서울의 ‘빅5′라 불리는 대형 병원 중에선 삼성서울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성모병원이 각각 4명으로 가장 많았고, 서울대병원이 3명이었다. 국내 뇌혈관 개두술 의사는 146명으로 전체 신경외과 의사 3025명(6월 기준)의 5%에 불과하다. 대한신경외과학회 김우경 이사장(가천대 길병원 원장)은 “사실상 고도 숙련 의사가 서울, 수도권에 몰리는 걸 감안하면 지방에는 개두술을 하는 의사가 없는 곳이 수두룩하다”며 “그럿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뇌동맥류에 문제가 생기면 비극적인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의료 공백 문제가 앞으로 더 심각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신경외과를 비롯해 생명과 직접 관련된 과목의 의사들은 1990년대 삼성서울병원, 아산병원 등 대형병원이 설립되면서 대거 육성됐는데 향후 4~5년 뒤 이들이 퇴직하면 의사 부족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의료계에선 은퇴까지 10년도 남지 않은 50대 시니어 개두술 가능 의사가 전체의 60%를 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흉부외과, 소아과 전공의도 없다

반면 신경외과를 비롯, 환자 생명을 직접 책임지는 필수 과목에선 갈수록 전공의 지원자들이 줄고 있다. 복지부에 따르면 피부과(지원율 163.8%), 안과(176.8%), 성형외과(171.8%) 등 상대적으로 수입이 높은 전공은 올해 정원보다 많은 전공의가 지원한 반면, 흉부외과·외과·산부인과는 정원을 채우지 못한 병원이 수두룩하다. 서울 대학병원 응급실에선 전공의가 없어 환자를 돌려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2018년까지 지원율 100%를 넘었던 소아청소년과는 4년 만에 20%대로 지원율이 급감했다. 일산의 한 소아과 전문의는 “저출산이 심각해지면서 젊은 의사들이 향후 소아과 시장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아과 전공의가 크게 줄면서 서울에서도 빅5 대형 병원을 제외하면 소아과 응급실을 운영하는 곳을 찾기 어려워졌다. 서울 성동구에 사는 직장인 김모(37)씨는 지난달 24일 밤 7세 딸이 구토를 하는 등 장염 증세를 보이자 인근 한양대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진료 접수조차 못했다. 최근 2년간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를 받지 못해 어린이 환자를 진료할 당직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지방은 더 열악하다. 산부인과 의사가 절대 부족한 강원도의 경우 모성 사망비(인구 10만명당 출산 중 숨지는 산모수)가 32명으로 중국·스리랑카와 비슷한 수준. 서울의 한 대학병원 소아청소년과 1년 차 전공의는 “경기도는 기본이고 강원도, 제주도에서도 어린이 환자가 찾아온다”며 “이미 지방은 의료 전달 체계가 붕괴된 것 같다”고 했다.

◇고강도 근무, 낮은 수입에 지원자 전멸

이처럼 필수 과목이 비인기 분야로 전락한 데에는 높은 근무 강도, 낮은 수입 등이 그 이유로 꼽힌다. 기동훈 중앙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종합병원에서 한 과목의 담당 의사가 2명일 경우 당직을 한 다음 날에도 저녁까지 근무해야 하기 때문에 1.5교대를 한다”며 “2, 3일 만에 퇴근했다가 몇 시간 만에 다시 출근하면 아이들로부터 ‘아빠, 집에 또 놀러 와’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특정 진료 과목 내에서도 양극화가 생긴다. 인구 대비 신경외과 의사 수는 한국이 미국의 4.6배. 그러나 뇌혈관, 뇌종양 분야는 고강도 근무 탓에 기피 1순위로 꼽히며 의사가 부족하다. 생명과 직결되는 뇌 수술 의사를 길러내지 못하는 이유다. 김용배 세브란스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신경외과 내에서도 응급 수술이 없고 향후 개원해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척추질환 분야를 많이 선택하는 추세”라며 “어렵게 뇌혈관 수술을 해도 환자가 사망하면 소송에 휘말리기 때문에 뇌수술 의사를 택하는 후배들이 줄고 있다”고 했다.

◇의료 수가 인상하면 나아질까

의료계에선 이번 사태로 의료 수가(酬價)를 재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은 사보험이 중심이 된 미국과 달리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의사의 진료·수술의 가격을 정한다. 뇌동맥류 수술 수가는 377만원(상급종합병원 기준)이다. 5시간 넘게 고난도 수술을 하고도 30분이면 끝나는 쌍꺼풀 수술이나 코·턱 성형수술, 지방흡입술 등 상대적으로 난도가 낮은 수술과 똑같은 돈을 받는 것이다. 마상혁 창원파티마병원 소아감염병과 교수는 “의료 수가는 10여 년 전 그대로인데 인건비, 자재비 상승에 병원 입장에선 경영 효율을 위해 필수 인력마저 최소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문재인 정부 시절 보험 급여 항목을 대폭 늘린 ‘문재인 케어’ 시행으로 의료 수가 산정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허리, 척추 MRI(자기공명영상진단) 등 응급 분야가 아닌 항목까지 급여화하면서 건보 재정이 크게 줄었고, 다른 필수 의료 분야의 수가 인상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건보공단에 따르면 초음파·MRI 항목에 들어간 진료비는 보험 급여화가 시작된 2018년 1891억원에서 지난해 1조8476억원으로 10배 증가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외과의는 “허리 아픈 사람까지 보험 적용을 하는 것보다 아산병원 간호사처럼 생사에 직결된 뇌혈관 수술의 수가를 높이는 게 중요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다만 최근 물가 인상 등으로 가계 부담이 높아진 상황에서 의료 수가 조정이 이뤄지기엔 어렵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국내 건보 부담률(7%)이 미국(15%) 등 선진국과 비교해 낮은 수준이지만 부담률을 당장 높이기 힘들어 수가 조정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필수 진료 과목에 대해선 별도의 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고민해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