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글스는 한국 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구단으로 꼽힌다. 1986년 창단해 긴 역사를 자랑하지만 신생팀에 속하는 NC, KT보다 순위가 낮다. 지난 10년 동안 5차례나 최하위 자리에 머물렀다. 류현진·구대성·한용덕·장종훈 등 스타 선수들도 적지 않았지만 우승은 단 한 차례(1999년), 나머지 시즌도 상위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작 야구계 사람들이 가장 혼란스러워하는 건 ‘보살’이라 불리는 한화의 열성팬들이다. 매 시즌 구단 성적은 바닥을 기는데 팬들의 응원 열기는 해가 갈수록 뜨거워지기 때문. 보통 야구팬들은 7회까지 4~5점 차 이상 벌어지면 9회까지 남은 경기를 보지 않고 경기장을 나선다. 하지만 한화 팬들은 한화가 10점 차로 뒤지고 있어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뒤늦게 1점이라도 올리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양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가장 인기 있는 응원가도 ‘나는 행복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관중석에서 부처 가면을 쓰고, 목탁을 두드리며 응원하지만 선수들이 아무리 경기를 못해도 육두문자를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살아있는 부처’ 한화 팬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사건이 최근 일어났다. 한화는 지난 22일 LG 트윈스전에서 10연패에 빠졌다. 삼미·쌍방울 등 과거 약체 대명사 팀도 쓰지 못한 KBO(한국야구위원회) 사상 첫 3년 연속 10연패 대기록이었다. 이 정도로 팀 성적을 죽 쑤면 단체로 응원을 보이콧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한화 팬들은 연패를 기록한 다음 날인 23일 경기에도 대전 구장 응원석을 채웠다. 온라인 팬 카페에도 “괜찮다” “다치지만 말아다오”라는 응원글이 넘쳐난다. 한화 팬들은 정말 보살인 걸까. 꼴찌 전담팀이 되다시피 한 한화를 향해 무한 애정을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튼,주말>이 홈 대전을 찾아 한화 팬들을 만났다.
“죽어도 팀 세탁은 못 해요”
지난 26일 오후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 삼성 라이온즈에 2대6으로 뒤진 8회말, 한화 유니폼을 입고 1루 응원석을 가득 메운 팬들은 치어리더의 동작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불렀다. 유치원생부터 70대 노부부까지 눈빛은 결연했다. 임순정(71)씨는 “질 때마다 경기를 안 보면 한화팬이 아니다”라며 “기본적으로 패한다고 생각하고 야구를 보러 오기 때문에 점수 하나, 안타 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청주에 사는 회사원 이욱준(41)씨는 “우스개로 팬들은 선수와 달리 FA(자유계약선수)가 없다고 말한다“며 “한화가 아무리 못해도 팀 세탁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선수는 몸값에 따라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있지만 한화 팬은 응원 팀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정훈씨는 “아들이 공부 못한다고 내쫓을 수 없듯 한화 선수들도 잘하든 못하든 품어주는 게 부모 같은 팬들의 역할”이라고 했다.
한화 팬들은 “중독성 때문에 한화 응원을 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팬을 그만두고 싶다가도 기적처럼 역전에 성공하는 명승부가 적지 않다 보니 계속 응원한다는 것이다. 팬들 사이에선 ‘한화는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마리한화(마리화나+한화)’라는 말까지 있다. 직장인 윤희명(29)씨는 “한화는 꼭 나쁜 남자, 츤데레 같다”며 “죽 못하다가 한순간 잘하면 다시 빠지게 되는 반전 매력 때문에 헤어나오기 어렵다”고 했다.
연고지인 대전의 지역 특성도 견고한 팬덤을 만드는 요인이다. 한화 야구단은 모기업 한화가 사업을 시작한 천안, 제2연고지인 청주, 박찬호의 고향인 공주 등 충청 출신들이 대를 이어 팬이 된다. 천안에 사는 직장인 김현정(31)씨는 “30년 한화 팬인 아빠를 따라 한화를 응원했는데 재작년 ‘팀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가 아빠한테 등짝을 맞았다”며 “지금은 친구들에게 한화 입덕(팬이 됨)을 권할 정도로 찐팬이 됐다”고 했다. 팀 성적이 부진해도 “괜찮아유~”라고 말하며 잊어버리는 충청도 정서도 한화 팬들을 ‘보살’로 만든다. 이정훈(43)씨는 “한화를 꼴찌라고 하면 안 된다.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가는 시기라 믿는다”고 했다.
‘꼴찌 이미지’를 좇아 응원하는 팬들도 늘고 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김상희(28)씨는 “한화는 야구장을 다녀온 뒤 인증 사진을 올릴 때 해시태그(#)를 달 요소가 많아서 SNS 활동이 많은 2030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실제 한화는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검색하면 강성 팬들 많기로 유명한 롯데 자이언츠(부산), 기아 타이거즈(광주)보다 관련 게시물이 더 많다. ‘한화는 성적이 안 좋을수록 응원 팬이 늘어난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 프로야구 해설위원은 “요즘 한화를 응원한다고 말하면 ‘약팀이지만 성적과 상관 없이 지지하는 착한 팬덤’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다는 인식이 강해져 많은 사람이 연고와 관계없이 한화 팬을 자처하고 있다”고 했다.
“끈기가 남다르군, 합격!”
한화 팬들은 때론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성적이 좋지 않은 구단을 무턱대고 응원하는 모습이 상식 밖이라는 것이다. 지난 2013년 개막 9연패 뒤 김태균을 비롯한 한화 선수단이 삭발을 하자 온라인 야구 커뮤니티에선 “팬들은 부처, 선수는 승려가 된 웃픈 상황”이라는 비아냥이 나왔다. 한화의 연패가 길어질 때면 타 구단 팬들이 ‘한화 이글스 팬분들 힘내세요’라는 현수막을 만들어 야구장에 걸기도 한다. 최근 온라인에선 한화와 한화팬을 풍자한 유머글도 돌고 있다. 야구 경기를 보던 초등학생이 “아빠, 한화는 왜 5연패나 했어?”라고 묻자 아버지가 “그건 한화가 5경기를 치렀기 때문이야”라고 답한다. 한화팬을 저격한 글도 있다. ‘대기업 입사 시험에서 지원자가 자신의 장점에 대해 “저는 인내심이 강합니다. 10년째 한화 팬이거든요”라고 말한다. 면접관은 책상을 손으로 탁 치며 “끈기가 남다르군, 합격!”이라고 외친다.’
한화가 팀 순위뿐 아니라 팀타율, 평균 자책점 등 여러 부문에서 10구단 중 가장 성적이 낮은 점도 야구팬들에겐 비판의 대상이다. 한화를 향한 조롱이 늘자 한 여성 팬은 최근 ‘한화를 좋아한다고 하면 측은하게 애쓴다고 한다. 그런 소리 듣지 않게 힘내주라’라고 쓴 스케치북을 들고 경기장에 나타났다.
“더 못해서 다른 기업에 팔렸으면”
한화의 부진이 길어지면서 한결 같던 팬심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팀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 한화팬이라고 밝힌 한 남성은 “꼴찌 팀은 신인 선발 1순위 지명권을 받아 전력을 보강할 수 있는데 한화가 장기간 침체가 계속된 것은 팀이 리빌딩을 아예 포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근 한화 주장 하주석이 심판 판정에 항의해 팬들이 있는 1루 응원석 바로 아래 더그아웃을 향해 헬멧을 던진 것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한 40대 한화팬은 “어린이들도 보는데 헬멧을 던지고 욕설을 하는 건 분명 도를 넘었다”며 “팬들에 대한 보답은 파이팅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팬들의 아우성은 모기업 한화 그룹을 향하는 경우가 더 많다. 선수는 열심히 하려 하는데 구단 지원이 열악하다는 것이다. 최근 온라인에선 “차라리 팀이 더 연패를 해서 다른 기업에 팔렸으면 좋겠다” “팬들의 응원이 당연한 게 아니다” 등 수위 높은 비난글이 올라오고 있다. 올 시즌 개막과 동시에 핵심 전력인 외국인 투수 2명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는 등 비상식적인 사고가 이어지면서 팬들의 인내심도 조금씩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화 팬들 사이에선 야구광으로 유명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문구가 화제가 되고 있다. 하루키는 일본 리그에서 약체라 평가받는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평생 응원한 골수팬. 그는 “의학서적에서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건강을 활성화하는 분비물이 몸에서 더 많이 나온다고 하던데 32년간 승률을 보면 야쿠르트가 아니라 다른 팀 팬이 되는 게 훨씬 더 충실한 인생을 보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한탄한다. “내 인생을 돌려줘. 내 소중한 분비물을 돌려줘”라고. 한화의 보살팬들도 이대로 팀의 성적 부진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하루키처럼 외치고 싶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