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영석

우리 아들은 ‘선수’다. 동네 할머니들이 그렇게 부른다. 우리 아들이 공원에 등장하면 뽀글머리 할머니는 “선수 나왔네, 선수!” 하며 함박웃음을 짓고, 선글라스 할머니는 옆자리 몸뻬 할머니에게 “쟤가 우리 동네 선수”라고 귀엣말로 속닥이며 이 동네 사정 밝은 고참이란 사실을 슬며시 내보인다.

갓 두 돌 지난 우리 아들은 킥보드를 기막히게 잘 탄다. 앉아 타는 유형 킥보드인데, 그 분야에 있어서는 또래 가운데 상위 1% 안에 든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냥 ‘선수’라고 평가하기에는 좀 섭섭한 구석마저 있어, 첫돌 무렵부터 지금 수준으로 잘 탔다. 언어 발달은 느려도 행동 발달은 기막히게 빠른 녀석이라 생후 10개월에 걸었고, 돌 때는 거의 뛰어다녔다. 아무렴, 킥보드도 그때 이미 잘 탔지. 몸치(癡) 박치 운동치인 아비를 닮지 않아 다행이다.

어린이집 끝나면 나는 아들을 앞세우고 의기양양 동네 공원으로 나선다. “우와, 몇 개월인데 이렇게 잘 타요?”라는 물음에 빙그레 웃기만 한다. ‘뭘 이 정도를 갖고 그러세요’라는 표정으로 어깨에 은근히 힘을 준다.

우리 편의점 단골손님인 1946년생 K 선생은 왕년 어느 기업 사장이셨다.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된, 모두가 알고 있는 국민 기업이다. 지방에서 태어나, 최말단 사원으로 시작해, 차근차근 계단 밟아 대기업 등기이사 자리까지 올라갔으면 흙수저 샐러리맨으로는 성공한 인생 아니겠나. 내가 K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러한 사회적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겸손한 태도, 노년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여유에 있다.

선생은 ‘왕년에 내가’라고 대놓고 자랑하시는 법이 없다. 언젠가 K 선생과 말씀을 나누다가 다른 손님이 언뜻 내용을 듣고는 “높은 자리에 계셨는가 봅니다” 하고 궁금해하니 “그냥 월급 받고 살았소”라며 허허허 웃으시더라. 진정한 고수는 그런 법이다.

그렇게 자기 자랑에는 인색한 K 선생이 끝 모를 자랑 인플레이션을 노출하는 분야가 있으니 역시 ‘자식 자랑’이다. 특히 큰따님 자랑을 기막히게 한다. 왜 ‘기막히게’라고 표현하냐면 자랑인 듯 자랑 아니게 자랑하시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걔는 누굴 닮아 그렇게 냉철한지 모르겠어”라거나, “한번 뭐를 목표로 삼으면 끝내 이루어야 직성이 풀리는 얘였어. 어휴, 지독했지. 지독했어” 하시는 거다. 자랑인지 비난인지, 주관인지 객관인지 오묘한 경계선을 넘나드는 초절정 자랑법이다.

한번은 이런 자랑을 하셨다. 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주위 사람들이 큰따님에게 “K 사장님 딸 맞지요?”라고 묻곤 했단다. 대단한 아버님을 두셨다는 뉘앙스였겠지. 그럴 때마다 딸은 아빠가 자랑스럽다 말했고, 사실은 자신도 좀 으쓱했다나. 그런데 요즘엔 사람들이 선생에게 이렇게 묻는단다. “어머나, 홍콩에 모모씨 부친 되신다면서요?” K 선생의 큰딸은 홍콩에 본사를 둔 세계적 기업에서 아시아권을 총괄한다. 내가 누구의 아버지라는 사실로 기분 좋을 때, 아비로서 그때만큼 기쁠 때 있을까.

그런 K 선생에게 요즘 새로운 자랑이 하나 더 생겼다. “어휴, 걔는 제 엄마보다 훨씬 더해. 악착같기가 이루 말할 데 없고, 머리 돌아가는 수준이 보통이 아니야. 표현력도 보통이 아니라니까.” 여기서 ‘걔’는 선생의 여섯 살짜리 손녀딸이다.

돌아보면 어릴 적 나는 아버지 칭찬에 굶주렸다. 아버지는 한 번도 나를 제대로 칭찬하신 적이 없다. 어떤 과목을 백 점 받아도 “올백을 받았어야지” 하는 식이었고, 올백을 받아 오면 “올백짜리가 학교에 열 명쯤 되나 보지?” 하고 무시하곤 하셨다. 실제 열 명쯤 되었고.

몇 년 전 아버지가 이사를 했다. 홀로 사는 단칸방 살림이라 도왔는데, 서랍장 안쪽에 책이랑 잡지 몇 권이 단정히 포개져 있는 모습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모두 내가 쓴 책, 내 글이 실린 잡지였다. 한 번도 책을 드린 적 없는데. 출간 소식을 알린 적도 없는데. 잡지에 내 기고문 부분에만 따로 표시돼 있었다.

아버지는 청운의 뜻을 안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얼마 뒤, 몇 가지 서류를 친구분에게 맡겨 놓았다기에 내가 찾으러 간 적이 있다. 처음 뵙는 그분이 나를 보자마자 환히 웃으며 하신 말씀은 “아따, 그렇게 칭찬하던 그 아드님이시네”였다. “아들 자랑을 어찌나 주야장천 해대던지, 내가 아주 자네 이력을 외우네, 외워.” 실제로 그분은 내 어릴 적 이런저런 무용담, 그동안 쓴 책 제목과 연재하는 매체 목록은 물론, 어떤 칼럼은 대강의 내용까지 기억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내가 쓴 칼럼을 오려 지갑에 항상 지니고 다니셨다고 한다. 친구분들끼리 모여 자식 자랑이 화제에 오를 때면 그것을 무적의 카드처럼 꺼내 보이며 이렇게 평정하셨다지. “우리 아들이 대(大)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여!” 아 아버지, 그건 아니고요.

그러고 보면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생각하는 경로는 깔때기와도 같아, 넓은 주둥이에 쏟아부은 원망과 서운함, 미움과 불평의 감정들도 결국엔 그리움이라는 관(管)으로 모여 흐른다.

오늘도 나는 아들 녀석을 앞세우고 동네 공원으로 나간다. 요즘 우리 아들은 킥보드를 타고 달리다 편의점만 보면 멈춰 선다.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가 냉장고 앞에 선다. 다짜고짜 뽀로로 음료수를 가리킨다. 어떤 편의점, 어느 곳에 진열되어 있든 바로 찾아낸다. 역시 내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