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타계한 배우 강수연씨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알 수 없지만, 우선은 비록 어려움이 있더라도 예술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말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른 시구(詩句)가 있었습니다. 서정주 시인의 ‘무등(無等)을 보며’의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는 첫 구절입니다.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무슨 시가 이렇게 시작하지? 마치 단호한 격문(檄文)의 한 구절 같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지는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를 읽자 그 뜻은 분명해졌습니다. 가난은 조금 불편하거나 누추해 보일 뿐 우리의 본성이나 자존심을 흔들 수 없는 지극히 사소한 것이며, 그렇기에 시인은 가난 속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서정주 시인이 6·25 무렵 곤궁한 피란 생활을 하면서도 앞날의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각오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가난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가난은 불편함을 넘어 자칫하면 사람을 비굴하거나 추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맹자도 ‘유항산 유항심(有恒産 有恒心)’이라 하여, 사람은 재산이 어느 정도 있어야 바른 생각을 하며 사람 행세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빈자(貧者)이기도 부자(富者)이기도 원하지 않는다는 아굴이라는 사람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만나면 숙연해집니다. 보통 사람은 공감은 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경지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장 8~9절)
그러나 세상 살면서 우리를 불편하거나 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가난만이 아닙니다. 즉 강수연씨가 말하는 ‘돈’이나 서정주 시인이 언급한 ‘가난’은 그저 경제적 곤궁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곡된 이념이나 인간관계, 세속적 이해와 헛된 명예심에 흔들리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0년 9월 해경은 서해상에서 실종되었다가 북한에 피격 사망한 소속 공무원의 월북 여부에 대하여 “자진 월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하였으나, 그로부터 1년 9개월이 지난 16일 국방부와 해경은 “월북 의도를 못 찾았다”며 결론을 뒤집고 사과하였습니다. 어차피 직접적인 증거보다는 정황으로 판단한 사건인데, 추가로 발견된 자료도 없이 기존 자료를 토대로 다시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그 사이 정권만이 교체되었을 뿐입니다. 일부 언론의 보도처럼 청와대의 지침에 따라 자체 판단과는 달리 발표하였기에 이제라도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뒷맛이 개운치 않습니다. 보다 정확한 사실관계가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가끔, 특히 정권이 교체되면서 벌어집니다. 한 정권이 아니라 나라의 신뢰를 흔드는 문제들입니다.
자신의 양심이나 판단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에겐 ‘가난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삶의 무게이고, 가오(’かお’는 일본어로 ‘얼굴’ ‘체면’을 뜻함)는 떳떳이 내세울 것이 아니라 감춰 버려야 할 임시변통의 장식물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강수연씨의 말은 한마디로 ‘당당하게 살자’를 뜻하는 것으로, 나름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