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직장인 김모(34)씨는 2년 전쯤 친구들로부터 ‘은행에 돈을 넣어두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란 말을 듣고 주식·코인 투자를 시작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에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 ‘영끌’ 투자를 했다. 그런데 최근 주식과 코인 모두 폭락장이 이어지면서, 그간 냈던 수익은 물론 투자 원금까지 손실을 봤다. 지난달 주식과 코인 대부분을 정리한 김씨는 “당분간은 고위험 자산 투자는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힘들게 번 돈이 한순간 삭제되는 걸 경험하니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적금으로 차곡차곡 모으는 게 저랑 맞는 것 같아요.”

작년만 해도 MZ세대 사이에선 ‘요즘 누가 적금 드느냐’는 말이 유행어처럼 통용됐다. 제로(0)에 가까운 예금 금리가 지속하면서,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높은 수익을 좇는 이들이 많았던 것. 여기에 ‘나만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란 포모(FOMO) 증후군까지 더해져, 난생처음 투자를 시작한 이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런데 최근 주식과 코인 시장에 한파가 몰아닥치고 금리가 오르자, 안전 자산인 예·적금으로 눈을 돌리는 이들이 많아지는 ‘역(逆)머니무브’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은행권에 따르면, 5대 시중 은행(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의 정기 예·적금 잔액은 지난 3월 말 이후 가파르게 늘고 있다. 3월 말 약 694조원이었던 예·적금 잔액은 지난달 27일 기준 약 723조원을 기록했다. 약 3개월 만에 29조원가량 불어난 것이다.

예·적금에 관심을 갖는 MZ세대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고금리 특판 상품을 찾는 ‘특판족(族)’이다. 특판의 경우 선착순으로 상품 판매가 완료되므로 ‘오픈런(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 바로 산다는 뜻)’을 불사한다. 지난 2월 가입 대란이 일었던 ‘청년희망적금’에 가입한 이후로 특판 예·적금을 찾아다닌다는 취업준비생 송모(28)씨는 지난달 초 지역 새마을금고에서 연 5% 금리를 제공하는 적금에 가입하기 위해 두 차례나 은행을 방문해야 했다. 첫날은 오전 11시에 갔는데, 대기 중인 사람이 많아 번호표도 받지 못하고 허탕을 쳤다. 둘째 날은 오전 8시쯤 은행을 찾아 10시 30분쯤 적금 계좌를 개설할 수 있었다. 매달 고금리 적금에 가입하는 ‘풍차돌리기’ 재테크를 시작한 박모(35)씨는 “주식·코인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예·적금만 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요즘엔 싹 사라졌다”고 했다. 케이뱅크가 지난달 1일 출시한 최고 연 5% 금리의 ‘코드K 자유적금’은 이틀 만에 10만4229좌가 팔렸는데, 전체 가입자 중 73%가 2030세대였다.

'26주 적금'이란 해시태그(#)를 단 인스타그램 게시물들. 카카오뱅크의 소액 단기 적금인 '26주 적금' 상품 가입자들이 올린 '인증샷'으로, 적금 계좌에 돈을 매주 자동이체로 납입하면 은행 앱에서 볼 수 있는 화면들이다. /인스타그램

은행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예·적금을 게임처럼 즐기는 ‘펀세이빙족’도 있다. 많은 은행이 최근 재미 요소를 강조한 상품을 내놓고 있다. 대표적인 게 토스뱅크의 ‘키워봐요 적금’, 카카오뱅크의 ‘26주 적금’이다. 키워봐요 적금에 가입하면 휴대폰 앱상에서 알을 하나 받는다. 이 알은 다음 날 부화해 거북이·문어·망아지·유령 등으로 자라나는데, 매주 적금 자동 이체를 할 때마다 진화하고 6개월 뒤 최종 만기 일에는 ‘전설의 동물’이 된다. 1990년대 유행했던 ‘다마고치(휴대용 디지털 애완동물 키우기 게임)’와 비슷한 콘셉트. 26주 적금은 1000원·2000원·3000원·5000원·1만원 중 하나를 첫 주 납입액으로 선택, 매주 그 금액만큼 증액해 저축하는 소액 단기 적금 상품이다. 가입할 때 라이언·어피치·춘식이 등 카카오프렌즈 캐릭터를 선택하는데, 매주 돈을 납입할 때마다 캐릭터가 하나씩 늘어난다.

두 적금의 만기 시 최대 금리는 모두 최고 연 3%. 다른 은행의 예·적금 상품과 비교해봤을 때 금리 면에서 큰 경쟁력은 없지만, MZ세대 사이에선 인기가 높다. 친구 추천으로 두 상품 모두 가입한 대학생 최모(23)씨는 “적금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적은 돈이지만 꾸준히 모은다는 성취감에 ‘갓생(God+生, 계획적이고 모범적인 삶)’ 사는 느낌이 들고, 인스타그램으로 (캡처 사진을) 친구들하고 공유하는 것도 재밌어요.” 지난달 14일 출시된 키워봐요 적금은 사흘 만에 10만좌가 넘게 개설됐고, 같은 달 21일 출시된 26주 적금의 신규 상품 ‘26주 적금 with 오늘의집’은 사흘 만에 15만좌를 돌파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재미와 성취를 동시에 즐기길 원하는 MZ세대를 겨냥한 상품이 최근 많이 출시되고 있다” 고 했다.

한화투자증권이 지난달 낸 ‘2022 MZ세대 투자인식 보고서’에 따르면, MZ세대가 경험해 본 재테크 및 투자법은 예·적금(64%)이 가장 많았고, 이어 주식(54%), 앱테크(53%) 순이었다. 여성(71%)이 남성(58%)보다 예·적금을 주요 재테크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주식과 코인의 대폭락을 경험한 MZ세대는 최근 가장 안전한 자산이 예·적금이라는 학습효과를 거두게 된 것”이라며 “소셜미디어로 교류하는 이들 사이에선 어떤 예·적금 상품이 인기가 높은지 등의 정보가 빠르게 퍼지고 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