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을 열고 몇 개월 뒤, 집에서 설거지를 하는데 내가 무언가 콧노래로 흥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인, 할인, 적립, 적립, 결제, 결제, 팝카드, 팝카드….” 그날 무척 좋은 일이 있었던가 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매장에서 틀어주는 CM송을 흥얼거리고 있다니, 이거 심각한 직업병이로구나 싶었다.
점포에서는 반드시 이런 음악을 틀어야 한다는 규정 같은 건 없는데, 그때는 내가 착실한 가맹점주였는지,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제공하는 점내 방송을 종일 틀었다. 그 방송은 노래와 노래 사이에 한 번, 그러니까 대략 3분에 한 번씩, 중독성 강한 프랜차이즈 로고송을 반복해 틀어준다. 그걸 하루 12시간 이상, 매일 듣고 있다고 생각해보시라. 꿈결에도 “유어스, 유어스, 지에스, 지에스” 하며 중얼거리게 된다. 그때야 나는 결심했다. 잃어버린 ‘선곡권’을 되찾으리라.
다음 날 편의점에 가자마자 스피커에 연결된 기기의 잭을 뽑아 휴대폰으로 옮겼다. 노래방 애창곡을 틀었다. “고~독한 이 가슴에 외로움을 심어주고….” 조용필의 ‘기다리는 아픔’이 스무 평 편의점 안에 울린다. 캬, 얼마나 좋은가. 막혔던 무엇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열심히 진열대를 정리하던 우리 편의점 알바가 그런다. “사장님, 무슨 노래가 이리 구려요. 좀 신나는 노래 없어요?” 얀마, 감히 가왕(歌王)님 노래를 두고 구리다니! 하긴 편의점에서 틀어놓기에는 가사와 곡조가 그리 어울리진 않는다. 가왕의 다른 노래로 바꿨다. “그대가 돌아서면 두 눈이 마주칠까,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캬, 손님이 돌아서면 두 눈이 마주칠까 심장이 요동치는 편의점 점주의 설레는 마음을 고스란히 잘 담은 명곡이다.
그날 이후 편의점은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역세권 편의점을 운영하던 시절에는 자의 반 타의 반 심야 근무를 도맡았다. 퇴근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캔맥주를 사 가는 행렬도 뜸해질 즈음, 우리 편의점에서는 ‘봉달호의 음악 캠프’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자, 오늘은 어떤 노래로 이 밤을 꾸며볼까. 날씨가 좀 끄물끄물하니까 신나는 노래로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 비틀스의 ‘I Want to Hold Your Hand’를 선곡표에 올린다. 다음은 우리 가요가 좋겠다. 흥겨운 선율로 이어가 보자.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두 번째 곡으로 고른다. 리스트가 좀 올드하지 않으냐고요? 냅둬유, ‘내편내노’랍니다. “내 편의점에서 내 맘대로 노래를 틀겠다는데 어쩌실 거예요?”라는 뜻이다. 배철수 DJ의 기막힌 선곡에야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렇게 나는 나만의 선곡표를 만들어 심야 편의점 DJ 노릇을 이어 나간다.
손님들은 잘 눈치채지 못했지만, 좋아하는 팝가수 데이비드 보위가 사망했을 때에는 나만의 추모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온종일 보위 노래만 틀어놓았다. 딱 한 손님이 계산을 치르다 아쉬운 목소리로 그러더라. “글램 록의 전설이 세상을 떠났군요.” 아, 이토록 멋진 손님이라니. 그런 손님에게는 음료수라도 한 병 서비스로 드려야 했는데 그냥 보내드린 것이 아쉽다. 이 글을 보면 “저예요” 하며 찾아오시길.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하자면, 세상에 노래가 많고 많은데 왜 편의점에 대한 노래는 없는지 모르겠다고 작은 불만을 가진 적이 있다. 대한민국에 편의점이 5만곳이 넘는데, 이건 작곡가들의 태만이자 직무 유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스터 트롯의 ‘찬또배기’ 이찬원씨가 지난해 ‘편의점’이라는 제목의 신곡을 내놓은 것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삼각김밥 라면 하나.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홀로 가는 내 인생 위로하네. 우리 동네 편의점.” 캬, 역시 지혜로운 친구로세. 사흘 밤낮 편의점에 그 노래만 틀어놓았다.
회식 술자리에서 최고 권한은 주(酒)권 병(甁)권을 쥐는 것. 그날 마실 술의 종류를 결정하고, 술 따라주는 양과 몇 순배 돌아가는 속도를 조절하는 엄중한 권한이라지. 편의점 주인장이 편의점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 권한이 있으니 바로 선곡권. ‘내편내노’의 정신으로 오늘도 전국 편의점 5만곳에서는 특급 DJ들이 활약하고 계신다. 그러니 한적한 시간에 동네 편의점에 들렀는데 좋은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면 “아저씨, 오늘 선곡 끝내주네요!” 하고 칭찬 한번 해주시라. 음료수 서비스 쏟아질지 누가 아는가. 물론 신청곡도 받는다.
“한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 위해 노래 부르리.” 전봇대와 빌딩 숲 사이로 편의점 간판 불빛은 까만 하늘을 향해 밤새 직선으로 내달리고, 홀로 계산대를 지키고 앉아있는 외로운 마음들 사이로 노래의 강물이 구불구불 잔잔히 흐른다.